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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운보의 아내, 4남매의 엄마 아닌 예술가 박래현을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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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박래현 전

100년 전 태어난 여성 작가 재조명

회화, 판화, 태피스트리 138점 공개

"지금 보니 놀랍도록 현대적 미감"

1970년 판화 등 선구적 작업 주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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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실의 박래현 작가. 1960년대 추상화 작업을 하던 시기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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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 '작품', 1966~67, 종이에 채색, 169x135cm, 뮤지엄 산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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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의 판화 '시간의 회상'(1970~73), 에칭, 50.5x38.5cm.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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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우리는 박래현을 몰랐다."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에서 열리는 '박래현, 삼중 통역자' 전시를 본 관람객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작가는 알아도 박래현(1920~1976)이란 작가를 잘 알지 못했다는 뜻이다. 미술 교과서에서 그의 작품을 본 적 있거나, 미술을 전공했다고 해도 얘기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박래현이 추상화와 태피스트리, 판화를 넘나들며 작업했다는 사실에 놀라고, 그가 네 자녀의 엄마였으며 오십대 중반에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치열하게 작업했다는 사실에 다시 놀란다. 이른바 '작가 박래현의 재발견'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 덕수궁관 전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으로 우향(雨鄕) 박래현을 재조명하고 있다. 작가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박래현의 성취를 차분하게 들춰 보인다. 전시작은 총 138점으로, 1985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10주기 전시 이후 35년 만의 대규모 전시다.

전시를 준비한 김예진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박래현은 동양화의 재료와 기법을 넘어 세계 화단과 교류할 수 있는 풍부한 작품 세계로 뚜렷한 성취를 이룬 작가"라며 "그러나 그가 살았던 시대가 그를 '박래현'이라는 이름 대신 '운보 김기창(1913~2001)의 아내'라는 타이틀 안에 가두고 있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예술가 박래현이 재평가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100년 전 이땅에 여성으로 태어나···



박래현은 1920년 평남 진남포 대지주의 장녀로 태어났다. 여섯 살 되던 해 가족과 전북 군산으로 이주했으며, 전주여고보와 경성여자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여자미술전문학교에서 일본화를 공부했고, 재학 중 그린 '단장'으로 조선미전 총독상을 수상했다.

조선미전 시상식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한 박래현은 평생의 반려자가 된 운보 김기창을 처음 만나 결혼한다. 어릴 때 장티푸스를 앓아 청력을 잃은 김기창은 이미 스타 작가였다. 당시 둘의 결혼은 도쿄 유학생이던 부잣집 딸과 장애를 극복한 청년 화가의 만남으로 화제를 모았다. 두 사람은 1947년 결혼했으며 슬하에 3녀 1남을 두었다.



삶 자체가 끝없는 도전



전시는 총 4부로 나누어 박래현의 도전을 조명한다. 박래현이 일본에서 배운 일본화를 버리고 현대 한국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을 소개하고, 김기창의 아내이자 네 자녀의 어머니로 살았던 박래현의 면모도 들여다본다. 또 60년대에 세계를 여행한 뒤 독자적인 추상화를 완성하고, 이후 미국에서 유학하며 판화와 태피스트리 등으로 표현 영역을 확장해간 여정을 살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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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의 1943년작 '단장', 종이에 채색, 131x154.7cm. 개인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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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국전 대통령상 수장작 '노점', 종이에 채색, 267x210cm. 박래현이 막내딸을 출산하고 네 아이의 엄마가 된 뒤 완성한 작품이다.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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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남편 김기창과 함께 그린 '봄C'. 종이에 채색, 167x248cm, 아라리오 컬렉션. 박래현이 나무를 그린 뒤 김기창이 참새를 그리고 글씨를 썼다.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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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작 중 가장 먼저 눈길을 끄는 작품은 검정색 기모노 차림으로 빨간 경대 앞에 앉아 있는 소녀를 그린 '단장'이다. 인물화 기초를 탄탄하게 쌓은 박래현의 기량을 잘 보여주는 그림으로, 대담한 구도에 강렬한 색채 대비가 돋보인다. '이른 아침'과 '노점'은 일본화 영향에서 벗어나 입체주의를 탐구하던 시기의 작품으로 현대적인 감각이 남다르다. 두 작품은 1956년 대한미협전과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각각 받았다.



"가사에 쫓겨 그림은 언제 그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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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 '달밤', 1960년대 초, 종이에 채색, 76.5x59cm. 개인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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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 삼중 통역자'가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전시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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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을 계속한다’는 것을 조건으로 결혼했지만 출산과 육아, 그리고 가사 때문에 작가로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다. 1948년 『결혼과 생활』에 쓴 수필에서 그는 "(하루 일과가)기저귀 빨기, 밥 짓기, 청소하기, 아침 식사가 끝나면 이것저것 치우고···아기보기"로 이어진다며 "본업인 그림은 언제 그리나”라고 푸념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남편과 함께한 부부전과 백양회 회원전을 중심으로 작품을 발표하며 작업을 이어갔다. 1956년 작 '봄C'는 남편과 함께 그린 그림이다. 박래현이 등나무를 먼저 그리고 김기창이 참새를 그리고 글을 쓴 것으로, "오래된 등나무의 둥치를 표현한 박래현의 힘찬 붓질"이 인상적이다. 1960년대 초 그린 부엉이 그림 '달밤'도 볼수록 빼어나다. 물감과 아교의 번짐 효과를 활용해 표현한 질감과 색조가 섬세하고 풍부해서다.

1964년과 1965년에 미국 순회 부부전을 열고 미국·유럽·아프리카를 돌면서 박래현은 본격적으로 추상화 작업에 몰두했다. 구불거리는 노란색 띠와 붉은색·검정색이 어우러지는 추상, 이른바 '맷방석 시리즈' '엽전 시리즈'라 불리는 작품이 등장한 것도 이때다. 그중 1966~67년 작 '영광'은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작으로, 붉은색과 황색으로 표현되는 생명력과 동양화 특유의 먹물 번짐 기법이 결합한 대표작으로 꼽힌다.



독보적인 여성 예술가 박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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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래현,Recollection, 190~73, 에칭, 애쿼틴트, 60.8x44cm. 개인 소장. [사진 국립현대미수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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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여를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한 뒤 박래현은 판화 유학을 결심하고 1967년부터 1974년까지 뉴욕에 체류하며 판화와 태피스트리로 영역을 확장한다. 이번 전시에서 많은 관람객의 탄성을 자아내는 부분은 바로 후기 추상과 판화 작품을 소개한 대목이다. 특히 1970~73년 작 '리콜렉션', 1973년 작 '가면', 1975년 작 '고완' 등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들이 이 시기에 나왔다. 그러나 미국에서 귀국 후 동양화와 판화기술을 접목한 새로운 작품을 제작하겠다던 박래현은 갑작스러운 간암 발병으로 1976년 1월 타계했다.

박래현은 왜 이토록 묻혀 있었던 것일까. 김 학예사는 "작가가 타계하고 40년이 지나도록 우리의 시선이 미처 박래현의 자취를 좇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박래현은 '운보의 아내'라는 위상이 너무도 단단해 그를 독립적인 작가로 들여다볼 여건이 전혀 마련돼 있지 않았다"며 "이제야 우리가 박래현을 당당한 한 작가로 볼 수 있는 시대에 진입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세상을 떠난 지 40여 년이 지난 지금에야 갖춰진 우리 시대의 미적 안목과 젠더 감수성 덕분에 그를 온전한 작가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는 것이다.

강민기 충북대 교수는 "박래현은 현대적인 동양화의 새로운 경지를 연 화가였다. 이번 전시가 박래현의 눈부신 궤적을 더듬이 보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내년 1월 3일까지. 이후 내년 1월 26일부터 5월 9일까지는 국립현대미술관 청주관에서 전시된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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