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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한없이 느린 속도로…삶의 고통을 화면에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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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남녀 5명의 몸짓과 표정 변화를 45초간 촬영한 후 15분으로 확장한 빌 비올라의 2000년 작품 `놀라움의 5중주`. [사진 제공 = 부산시립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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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부산시립미술관에 걸린 검은 화면에서 중장년 5명이 가슴을 부여잡고 눈을 감거나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예기치 못한 불행과 죽음 등 비극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정지화면 같지만 인물들이 조금씩 움직인다. 기다리기 힘들 정도로 아주 느리게 느리게···.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동안 관람객은 화면 속 사람들에게 연민과 공감, 감정이입을 하게 되고, 각자가 겪었던 충격적 사건을 되짚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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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조수였던 미국 작가 빌 비올라(69)의 2000년 영상 작품 '놀라움의 5중주'는 남녀 5명의 감정과 몸짓, 표정 변화를 45초간 촬영한 후 15분 길이로 확장했다. 일체 소리와 배경을 제거해 상상의 여지는 더 많아진다. 화면의 시간을 늘려서 명상하게 만들기에 '영상예술의 시인'으로 불린다.

부산시립미술관이 그의 1976년작 '이주'부터 2014년작 '순교자 시리즈'까지 총 16점을 상영하는 개인전 '조우'를 펼쳤다. 서울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이 열린 적은 있지만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망라하는 국내 전시는 처음이다. 별관 '이우환 공간'을 소개하기 위한 프로젝트 '이우환과 그 친구들' 두번째 전시이기도 하다. 서양 작가이지만 현실 너머 초월적 세계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이우환과 교집합을 이루고 있어서다. 비올라는 기독교인이지만 1980년 일본에서 18개월간 선(禪)수행을 하면서 배운 동양 정신과 감성을 작품에 담고 있다.

느리게 돌아가는 그의 영상 작품 16점을 모두 보려면 총 5시간 26분이 걸린다. 3개 화면에서 세 사람이 등장하는 2000년작 '아니마'는 정지 순간이 길게 느껴져 인물 사진인 줄 알았다. 1분간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을 드러낸 표정을 촬영해 81분간 연장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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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작 흙의 순교자


40여년간 영상 200여점을 제작한 비올라는 2000년대 본격적으로 화면의 시간을 늘리는 작업을 시작했다. 시간에 쫓겨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잠시라도 느림의 미학을 선물하기 위해서다. 느린 화면 속에 인생의 고통을 인내하는 인간의 희생, 생로병사 등이 비명 없이 조용히 흐른다. 여섯 살 때 익사 위기에서 살아남고, 40대 초반에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자식이 태어나는 것을 경험한 후 삶과 죽음은 순환하며 결국 하나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작품들을 제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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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작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 중 최초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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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개 대형 화면에서 30분간 상영되는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는 순환 과정을 극대화해 보여준다. 끝없이 산길을 걸어가는 사람들, 타오르는 불길, 저택을 뒤덮는 대홍수, 임종의 순간과 늙은 노부부가 배를 타는 장면, 구조대와 조난자가 잠든 사이 연못에서 날아오르는 남자 등이 삶과 죽음, 부활을 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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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작 행로 우리는 날마다 나아간다 중 행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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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 3명이 만나는 '인사'는 1995년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관 출품작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사촌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는 르네상스 화가 자코포 다 폰토르모의 명화를 재현한 영상이다. 여인의 옷자락을 휘날리는 바람과 미묘하게 변하는 불빛, 세 여인의 표정으로 상황을 추측하게 된다. 작가가 관람객들에게 도슨트(해설)을 못하게 해서 오로지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감상해야 한다.

유년시절 물에 빠졌을 때 바라본 바깥 세상이 너무 아름다워 삶과 죽음, 이 세상과 저세상을 나누는 물의 장벽을 반영된 작품이 여럿이다. 그 중 2001년작 '밀레니엄의 다섯 천사'는 옷을 입은 남성이 물웅덩이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여주는 다섯 비디오로 구성된 작품이다. 각 화면에서 천사가 갑작스러운 빛과 폭발적인 소리와 함께 표면을 뚫고 나와 평화로운 물의 풍경에 개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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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2009년작 밤의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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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작 '이주'와 1977~1979년작 '투영하는 연못', 1979년작 '엘제리드호(빛과 열의 초상)'는 비디오라는 매체로 이미지 변주를 탐구하는 시기 작품이다. '이주'에서는 희미한 화면이 점점 뚜렷해지면서 물방울에 비친 작가 모습이 등장하고, '투영하는 연못'에선 풍경과 물결은 움직이는데 연못으로 뛰어오른 남자만 정지돼 있다. '엘제리드호(빛과 열의 초상)'에선 설원을 걷는 사람 이미지 위에 호수와 사막, 초원 풍경이 겹쳐 존재 의미를 묻는다.

전시를 기획한 황서미 학예연구사는 "내 성격이 급한 편인데 이번 전시 기획은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보름 동안 영상을 들여다보니까 오롯이 내 감정에 집중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됐다. 시간을 확장해 내면을 바라보라는게 작가의 메시지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4월 4일까지.

[부산 =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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