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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4 (월)

가슴에 뚫린 구멍, 극사실주의 조각…왕건의 스승 희랑대사상이 국보 승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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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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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으로 알려진 희랑대사 건칠좌상. 왕건은 희랑대사를 스승으로 모셨고. 희랑대사가 이끄는 승군의 도움으로 후백제군을 격파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해인사 소장


국내에서 가장 오래됐고, 고려 태조 왕건의 스승으로도 알려진 희랑대사의 조각좌상이 국보로 승격지정됐다. 문화재청은 10세기 전반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합천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을 보물(제999호)에서 국보(제333호)로 승격 지정했다고 21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또 15세기 한의학 서적 ‘간이벽온방(언해)’와 17세기 공신들의 모임 상회연(相會宴)을 그린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 그리고 가야문화권 출토 목걸이 3건 등 총 5건을 보물로 지정했다.

‘희랑대사좌상’은 나말여초에 활약한 희랑대사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다. 대사의 생몰년은 미상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학자 유척기(1691~1767)의 <유가야기(游加耶記)>는 “고려 초 기유년(949년 추정) 5월에 나라에서 시호를 내린 교지가 해인사에 남아 있었다”고 기록했다. 따라서 희랑대사는 949년(정종 4년)) 이전에 입적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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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랑대사의 앞가슴에 뚫려있는 구멍. 빛을 발한 자취라는 이야기와 함께 희랑대사가 가슴에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희랑대사는 화엄학에 조예가 깊었던 학승이다. 해인사의 희랑대(希朗臺)에 머물며 수도에 정진했다. <가야산해인사고적>에 따르면 왕건(재위 918~943)은 920년대 말엽 후백제군과의 해인사 인근 전투 때 고전을 면치못하자 해인사 주지인 희랑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도움을 요청했다.

이때 희랑대사는 용적대군(승병)을 보내 왕건의 대승을 이끌었다. 왕건은 희랑대사를 더욱 공경하며 전답 500결을 시납하고 해인사를 중수했다. 1075년(문종 29년) 편찬된 균여(923~973)의 전기(<균여전>)를 보면 “희랑공은 우리 태조 대왕(왕건)의 복전(福田·일종의 스승)이 되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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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랑대사의 세부 얼굴모습. 긴 얼굴에뾰족한 턱, 큰 귀, 코 양옆에서 입가로 내려오는 팔자주름이 인상적이다.


현재 해인사가 소장중인 희랑대사상은 높이 82.3㎝, 무릎너비 60.6㎝ 의 등신상이다. 유사한 시기 중국과 일본에서는 고승의 모습을 조각한 조사상을 많이 제작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유례가 거의 전하지 않는다. ‘희랑대사좌상’이 실제 생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재현한 유일한 조각품으로 전래되고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의 조사결과 이 작품은 얼굴과 가슴, 손, 무릎 등 앞면은 건칠(乾漆)로, 등과 바닥은 나무를 조합해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후대의 변형 없이 제작 당시의 원형을 잘 간직하고 있었다. ‘건칠(乾漆)’은 삼베 등에 옻칠해 여러 번 둘러 형상을 만든 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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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랑대사의 손. 극사실주의 기법으로 조성됐다. 희랑대사의 실제 모습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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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칠기법이 적용된 ‘희랑대사좌상’은 육체의 굴곡과 피부 표현 등이 매우 자연스럽다. 마르고 아담한 등신대 체구, 인자한 눈빛과 미소가 엷게 퍼진 입술, 노쇠한 살갗 위로 드러난 골격 등은 매우 생동감이 넘쳐 생전(生前)의 모습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희랑대사좌상’의 또 다른 특징은 가슴에 작은 구멍(폭 0.5cm, 길이 3.5cm)이 뚫려 있는 것이다. 그래서 희랑대사에게 ‘흉혈국인(胸穴國人·가슴에 구멍이 있는 사람)’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희랑대사가 다른 스님들의 수행 정진을 돕기 위해 가슴에 작은 구멍을 뚫어 모기에게 피를 보시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고승의 흉혈이나 정혈(頂穴·정수리에 난 구멍)은 보통 신통력을 상징하며, 유사한 모습을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1024년·보물 제1000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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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의 흉혈이나 정혈(頂穴·정수리에 난 구멍)은 보통 신통력을 상징한다. 희랑대사상의 흉혈과 비슷한 유사한 모습을 ‘서울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1024년·보물 제1000호)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국내 문헌기록과 현존작이 모두 남아있는 조사상은 ‘희랑대사좌상’이 유일하며, 제작 당시의 현상이 잘 남아 있고 실존했던 고승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재현해 내면의 인품까지 표현한 점에서 예술 가치도 뛰어나다.

보물 제2079호 <간이벽온방(언해)>는 1525년(중종 20년)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역병(장티푸스)이 급격히 번지자 전염병 치료에 필요한 처방문을 모아 한문과 아울러 한글로 언해(諺解)해 간행한 의학서적이다. 의관 김순몽, 유영정, 박세거 등이 편찬했다. 1578년(선조 11년) 이전 을해자(1455년 주조된 금속활자)로 간행한 것이다. 병의 증상에 이어 치료법을 설명했고, 일상생활에서 전염병 유행 때 유의해야 할 규칙 등이 제시되어 있다. ‘간이벽온방(언해)’는 조상들이 현대의 코로나19와 같은 전염병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흔적을 보여주는 서적이다.

보물 제2080호 ‘신구공신상회제명지도 병풍’은 선조 연간(1567~1608) 녹훈된 구공신(舊功臣)과 신공신(新功臣)들이 1604년(선조 37년) 11월 충훈부에서 상회연을 개최한 장면을 그린 기록화이다. 이 때 이항복(1556~1618)과 유영경(1550~1608)이 상회연에서 선온(임금이 내린 술)을 하사받은 것에 사례하는 전문(箋文)을 선조에게 올렸다고 한다. 넓은 차양 아래 3단의 돌계단 위에서 공신들이 임금이 내린 술을 받는 장면이 중앙에 그려져 있고, 오른쪽에는 나무 옆에서 음식을 화로에 데우는 모습 등 준비 장면이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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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이벽온방(언해)>. 1525년(중종 20년)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역병(장티푸스)이 급격히 번지자 전염병 치료에 필요한 처방문을 모아 한문과 아울러 한글로 언해(諺解)해 간행한 의학서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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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 등 가야 시대 목걸이 3건은 ‘철의 왕국’으로 주로 알려진 가야가 다양하고 뛰어난 유리 제품 가공 능력으로 특유의 장신구 문화를 형성했음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보물 제2081호 ‘김해 대성동 76호분 출토 목걸이’는 2011년 3세기 말~4세기 초 금관가야 시기 중요한 고분 중 하나인 김해 대성동 76호 고분의 목곽묘에서 발견됐다. 보물 제2082호 ‘김해 양동리 270호분 출토 수정목걸이’는 1992년 토광목곽묘에서 발굴됐다. 보물 제2083호 ‘김해 양동리 322호분 출토 목걸이’ 역시 목곽묘에서 발굴한 유물이다. 함께 발굴된 유물 중 중국 한나라 청동 세발 솥 등을 통해 3세기 경 축조된 금관가야 시대 고분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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