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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이건희 삼성 회장 별세

[이건희 별세] 삼성상회 3남이 '글로벌 톱 삼성' 다지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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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으로 태어나 최대 대기업 집단 후계자로

창업보다 어려운 수성 맡아 매출 400조 기업 일궈

2007년 엑스파일 불씨로 회장 사임하기도

2009년 IOC 위원 자격 회복위해 특별 사면

복귀때 마다 위기론 강조, 글로벌 삼성 균열 방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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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故)이건희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위로 형 맹희와 창희 그리고 누나 인희, 숙희, 순희, 덕희가 있었고 아래로는 여동생 명희가 생겼다. 당시 아버지는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서 삼성상회를 경영하고 있었고 이 사업이 청과물과 건어물을 만주 등지로 파는 무역회사로 점차 자리를 잡아나고 있던 터라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척 바빴다. 그 바람에 어머니(박두을)는 이건희가 젖을 떼자마자 이 막내아들을 의령의 친가로 보냈다. 그래서 이건희는 할머니가 어머니인줄 알고 자랐다. 해방 후가 돼서야 이건희는 처음으로 부모 형제와 함께하는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시작했다.

1947년에 이병철이 사업을 확장하려고 서울로 이사를 했고 2년 뒤인 1949년에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했고 미처 피난을 가지 못한 이병철 일가는 공산치하에서 3개월동안 모진 어려움을 겪는다. 이병철이 타도대상인 자본가였기 때문이다.

서울 수복 후에 이병철 일가는 마산으로 내려갔고, 거기에서 이건희는 다시 초등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금방 대구로 이사를 갔고, 이건희는 다시 또 전학을 해야 했다. 하지만 대구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이병철이 부산의 동광동으로 자리를 옮겨 사업을 재개했기 때문이다. 부산에서만 두번 전학을 했다. 이렇게 해서 초등학교때 모두 다섯번이나 전학을 한 것이다.

부산사범부속초등학교 5학년 이전 1953년 아버지는 이건희에게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며 일본 도쿄로 유학을 보냈다. 당시 건희의 형 맹희와 창희는 이미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있었다. 이건희는 작은형 창희와 함께 일본인 가정부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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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위 형 창희와는 9살 차이였다.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고 같이 놀 친구도 없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사색과 공상을 즐기며 무엇인가 흥미를 느끼면 무섭게 파고드는 성향이 강한 인물로 성장했다. 그는 홀로 있는 시간에 영화, 개, 자동차, 전자제품 등에 빠져들었다. 이건희 회장은 예전 <신동아> 등과의 인터뷰에서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되어 내성적인 성격을 가지게 됐고, 혼자 생각을 많이 하고 또 깊이 하게 됐다”고 자신의 성격을 설명했다.

일본에서 소년 이건희는 엄청나게 많은 영화를 봤다. 초등학교 2년, 중학교 1년, 3년간 보았던 영화를 합산하면 1,200~1,300편이 된다고 한다. 영화에 대한 애착이 남달랐던지 “만일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영화사를 했거나 감독을 했을 것”이라고 이건희 회장은 말한다.

소년 이건희는 일본에서 중학교 1학년을 마치고 귀국한 뒤 서울대 사대부중을 거쳐 사대부고에 입학했다. 그리고 레슬링부에 들어갔다. 레슬링부에서 그는 단체 활동을 배웠다. 건희는 사대부고를 졸업하고 1961년에 연세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이건희를 일본으로 유학시켰다. 자기가 졸업한 와세다대학교 상학부였다. 선진국의 문물을 배워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신념이었다. 1965년 와세다대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서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공부했다. 부전공은 매스컴이었다.

이 즈음 부인 홍라희 여사와 만났다. 1967년 1월 두 사람은 약혼하고 4월 30일 결혼했다. 외롭고 힘겹게 유학생의 시간을 지내온 어건희는 1966년 귀국해서 삼성빌딩의 비서실에 출근했다. 견습사원이었다. 아침마다 신문을 읽고 삼성과 관련된 내용을 찾아 붉은색 밑줄을 긋는 게 일이었다. 아버지인 이병철 회장이 한눈에 기사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건희는 이런 생활을 그다지 오래 하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다. 1968년 말 아버지는 미국에 나가 있던 이건희를 불렀다. 아버지는 이 막내 아들에게 중앙매스컴(나중의 동양방송과 중앙일보) 이사로 임명했다. 이건희가 공식적을 삼성이라는 조직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이건희의 첫 사업은 반도체였다. 1979년 2월 27일 이건희는 삼성그룹의 부회장으로 승진한다. 이병철의 후계자로 공식화한 것이다. 하지만 이병철은 이미 오래 전 이건희를 후계자로 낙점햇다. 이병철은 1976년 9월 위암 판정을 받았다. 도쿄의 암연구소 부속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러 가지 전 가족들을 용인의 별장으로 불렀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삼성은 건희가 이끌어 가도록 하겠다”고 발언한다.

후계자가 된 이건희는 아버지로부터 특명을 받는다. 대한석유공사(유공)를 인수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1980년 11월 28일 유공은 선경에 돌아간다. 그 뒤 이건희는 해외 자원개발로 눈을 돌려 말레이시아의 석유회사 페트로나스와 삼성물산 등 4개 회사가 컨소시엄을 구성해 원유를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하고, 또 알래스카 베링리버 탄광 개발에도 착수했다. 하지만 2차 석유 파동이 끝나고 원유가가 안정되면서 빛을 잃었다.

이건희는 동양방송국(TBC)을 신군부에 뺏긴다. 이건희에게 동양방송국은 각별한 회사였다. 이건희가 삼성에 첫발을 내디딘 곳이 그곳이었고, 그래서 쏟은 애정과 노력은 남달랐다. 행복을 송두리째 빼앗긴 이건희는 낙담했다. 그래서 그는 개개인이 의사를 무시하고 획일성만을 강요하는 군사문화를 강하게 비판한다. “군사 문화로 인해 우리는 함께 생각하고 해결책을 찾는 것 보다 명령을 받은 데 익숙해 졌다.”

1986년 5월 이병철의 몸에 이상징후가 나타났다. 미열을 동반한 감기 기운이 계속되는 가운데 왼쪽 폐에 이상 징후가 나타났다. 검사 결과 암으로 판명됐다. 1987년 11월 19일 이병철이 사망하고 이건희가 삼성을 넘겨 받는다. 그의 공식 취임은 12월 1일 있었다. 이날 취임사에서 이건희 회장은 “미래 지향적이고 도적적인 경영을 통해 90년대까지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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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50년 동안 굳어진 체질은 바뀌지 않았다. 삼성은 아직 이건희의 것이 아니라 이병철이 것이었다. 법률적으로 오너가 됐지만 삼성은 그가 만든 조직이 아니었다. 9년 동안 부회장으로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최고 경영자로서 지휘를 해 본적이 한 번도 없었다. 세계 경제는 3저 호황 뒤의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몇 몇가지 일을 했지만 성과는 보이지 않았다. 조직 안팎에서는 이건희의 경영능력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이건희는 답답했다. 이대로 가다가는 삼성 전체를 잃을 수도 있다는 절박한 심정이었다. 그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그 해에 체중이 10킬로그램 이상 줄었다.

이건희는 삼섬 그룹 권력이 핵심인 비서실에 칼을 댔다. 1990년대 초반 비서실을 축소하고 비서실장의 권한을 대폭 축소했다. 이어 1990년 12월 아버지 3년상이 끝나는 시점에 비서실의 수장 소병해를 삼성생명 부회장으로 전격적으로 전출시켰다. 92년 누이들과의 재산 분배를 마무리했다.

1987년 12월 1일에 취임한 이건희는 5년여 동안 국내 재벌그룹 회장 가운데 가장 조용하게 보냈다. 그를 둘러싸고 온갖 소문이 들끓었다. 언제부턴가 세간에선 그를 ‘은둔의 황제’라고 불렀다. 하지만 1993년에 들어서자 이건희 회장은 그 동안 준비한 조직적 성과와 이론적인 방향성을 들고 경영일선에 전면적으로 나섰다. 3월 22일 월요일, 그룹 창립 55주년을 맞아 기념식이 서울 올림픽 공원 체조경기장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 ‘제2창업 5주년 기념사’라는 명연설을 한다.

이건희 회장은 제2창업 제2기를 선포하고 그룹의 경영 이념과 정신, 그룹 마크, 사가 등은 대대적으로 바꾸며 개혁작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대중 앞에 자주 나타나 삼성 개혁의 정당성을 국민에게 홍보했다. 5월 3일자 미국의 격주간 종합경제지 포춘은 한국의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이건희를 선정하고 표지에 그의 얼굴을 실었으며 특집 표지기사로 삼성그룹을 다뤘다. 그의 행보에 날개를 달아준 셈이었다.

양에서 질로의 전환을 강조한 프랑크푸르트 선인 직후인 93년 6월 10일 이건희 회장은 강연을 마치고 사장단을 자기 방으로 불러 들여서 강연 내용에 대한 반응을 듣는데, 이수빈 비서실장이 “아직은 양을 포기할 수 없다”고 발언하자 들고 있던 티스푼을 테이블 위에다 내동댕이 쳤다. 삼성인들 사이에 회자되는 ‘스푼사건’이다.

이건희는 개혁의 드라마를 쓴 뒤 곧바로 영토확장 드라마를 쓰기 시작했다. 1993년 삼성중공업의 상용차 생산설비를 증설했으며, 93년 6월에는 분당 서현역사를 매입해서 유통사업 진출을 본격화했다. 1994년 7월에는 한국비료의 정부 보유 주식을 매입했으며, 9월에는 중형항공기 개발 사업에도 참여했다. 95년에는 영상관련 사업을 위해 삼성영상사업단을 발족시켰고, 10월 13일에는 영국 동북부 윈야드 파크의 삼성전자 복합단지 준공식을 했다.

92년 7월 삼성은 업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승용차 사업권을 따냈다. 1994년 12월 5일 승용차 기술도입 신고서를 정부에서 수리한다. 95년 3월에 삼성자동차가 설립됐고 4월에 부산공장이 착공됐다. 98년 25만대, 2000년 50만대 생산 규모를 갖출 승용차 공장이었다. 하지만 판매부진으로 98년말까지 누적 적자액은 6,988억원으로 자본금(8,054억원)을 거의 잠식한 상태였다. 99년 6월 30일, 결국 삼성은 삼성자동차의 법정 관리를 신청하는 동시에 이건희 회장이 보유하고 있는 삼성생명 주식을 70만원에 평가해서 350만주(2조4,500억원)를 채권단에 증여했으며 종업원과 하청업체에 대한 위로금으로 삼성생명 주식 50만주(3,500억원)을 내놓겠다고 밝혔다. 그 뒤 삼성차는 2000년 4월에 르노에 인수됐다.

97년 11월부터 2001년 3월까지 이어진 IMF는 이건희에게 위기이자 기회였다. 덕분에 자동차 산업에서 손을 때고 전자 사업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 결과 2000년 사상 최대인 7조6,000억원의 이익을 실현했다. 2002년 삼성의 순이익은 11조5,000억원이었고 부채비율도 2003년 56%까지 떨어져 초유량 기업이 됐다. 신경영 선언 10년이 되는 2003년 이건희는 신년사에서 제 2의 도약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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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7월22일 MBC방송국의 이상호 기자가 안기부 엑스파일 녹음내용을 보도했다. 엑스파일 사건은 이학수 삼성전자 부회장과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이 나눈 대화를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가 도청한 사건인데, 삼성이 정·관계 인사를 어떻게 관리하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하지만 12월 검찰은 엑스파일을 보도한 이상호기자를 통신비밀보호법 위반혐의로 기소하고 엑스파일에 거론된 떡값 검사 및 대화 당사자인 이건희나 이학수 홍석현을 모두 무혐의 처리했다.

2006년 2월 7일 삼성은 기자간담회를 갖고 ‘삼성의 현안과 관련하여 국민께 드리는 말씀’을 발표한다. 이 자리에서 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이건희 회장이 96년 자녀들이 취득한 에버랜드 전환사채 등의 증여와 안기부 엑스파일 문제 등으로 사회적 논란을 일으켜 국민들께 심려를 끼친 데 대해 깊이 사과하고 8,000억원의 사회기금을 내놓키로 했다”고 말했다.

2007년 삼성의 법무팀장으로 근무했던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2008년 1월 10일 삼성특별검사팀이 출범했다. 4월 17일 수사 결과가 발표됐는데, 분식회계나 비자금, 정관계 로비 의혹 등은 모두 무혐의 처리했으며 경영권 불법승계 의혹에 대해서는 불구속 처리했다. 4월 22일 특검 수사발표가 있은 지 닷새 뒤 그는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2009년 5월 29일 대법원은 삼성경영권 승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한다. 이건희는 조세포탈 혐의만 인정돼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이 선고됐다.

2009년 12월 31일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 자격을 회복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기 위해 정부가 그를 특별 사면한다. 2010년 1월 9일 예순 여덟번째 생일날, 그는 복귀를 사실상 공식화하고 3월 24일 공식 복귀한다. 복귀 때 그는 위기론을 설파한다. 이후 4년간 이 회장은 줄곧 위기론을 역설했다. 섣부른 자만심으로 인한 글로벌 톱 삼성의 질주에 균열이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다.

2014년 5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진 뒤 6년만이다. 당시 자택에서 이 회장은 갑자기 호흡 곤란 증세가 나타나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가 와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응급 처치로 심장기능 상태를 회복한 이 회장은 이후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심장 혈관 확장술인 ‘스텐트(stent) 삽입 시술’을 받고 위기상황을 넘긴 뒤 10개월간 장기 입원치료를 받으며 회복세에 접어들었지만 끝내 병상을 털고 일어나지 못하고 타계했다. /이수민기자 noenemy@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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