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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6 (금)

40년 군부독재 헌법 몰아낸 칠레 “나라의 미래, 국민이 새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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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산티아고 개헌 국민투표 현장을 가다

수백m 인파…대선보다 높은 투표율

결과는 “개헌” 78% 압도적 찬성

내년 4월 투표로 제헌위원 선출

2022년초 국민투표로 새 헌법 승인


한겨레

칠레 개헌 국민투표가 치러진 25일(현지시각) 수도 산티아고의 프로비덴시아에 위치한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손소독을 하면서 투표 준비를 하고 있다. 산티아고/김순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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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체트 독재를 무력이 아니라 종이와 펜으로 몰아냈다. 오늘 다시 종이와 펜으로 나라를 바꾸게 됐다.”

25일(현지시각) 칠레의 헌법을 새로 만들지 여부를 묻는 역사적 국민투표의 현장에서 만난 세실리아 시푸엔테스(75) 할머니의 말이다. 할머니는 1988년 10월 독재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대통령의 집권 연장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서 ‘아니요’를 선택했고, 이날은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했다. 이날 국민투표에서 물은 다른 한가지 ‘새 헌법을 쓰는 기구의 구성’은 현 국회의원과 국민이 각각 50%씩 참여하는 방식이 아니라, 100% 국민투표로 새로 뽑는 구성을 선택했다. 할머니는 이 선택이 “보다 공정한 칠레를 만들기 위한 새로운 시작”이 되리라 믿고 있었다.

이날 오전 11시가 넘어가면서, 세실리아 할머니가 투표한 수도 산티아고 프로비덴시아의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는 200m 이상 긴 줄이 늘어섰다. 이날 투표율은 50.83%를 기록해, 최근 두번의 대선 투표보다 높은 관심을 나타냈다. 99.8% 개표 결과, 새 헌법 제정 찬성이 78.27%, 반대가 21.73%였다. 제헌기구 구성방식 역시 국회의원·국민대표 각각 50% 구성이 21.01%, 국민대표 100% 구성이 78.99%로 집계됐다. 두개의 국민투표 문항에 투표자의 80%에 가까운 절대다수가 할머니와 같은 선택을 한 것이다. 칠레 국민들은 이날 ‘피노체트의 잔재’였던 헌법을 40년 만에 역사 속으로 청산하기로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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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권조차 돈이 결정”…피노체트의 망령 걷어낼 첫발


칠레인들은 세실리아 할머니처럼 국민 스스로 만든 변화에 희망을 걸었다. 투표장에서 만난 호세파 오크만(29)은 지난해 10월 지하철 요금 50원 인상으로 촉발된 뒤 대통령 퇴진과 새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몇달째 이어졌던 시위의 현장에 나갔다. 호세파는 “폭력시위를 벌였다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수백만명이 변화를 요구했고, 이제 국민의 힘으로 권력을 되찾고 변화를 시작하는 것”이라며, “현 헌법에 가로막혀서 하지 못하던 법률 개정 등 나라의 근본적 변화를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기대를 걸었다. 투표장 안내를 하던 파올라 발렌수엘라(33)는 “나라의 미래를 스스로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이라며 “새로운 시대에 맞게 헌법을 바꾸도록 국민이 결정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4살 아들을 데리고 투표장에 나온 로돌포 세풀베다(29)는 “무능하고 비효율적인 의회와 정치권을 대신해 국민들이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세실리아 할머니도 “그동안 칠레가 살기 좋아졌지만 아직 모자란다”며 “폭력이 아니라 대화로 칠레를 바꿔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역사적 국민투표에 대한 설렘과 긍지도 느껴졌다. 친구와 투표를 하러 나온 알바로 파라오(45)는 “칠레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역사적인 순간이다.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이 나라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이라며 “남녀가 동수로 제헌위원에 참여하는 등 새 헌법에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내, 어두운 역사를 뒤로하고 새로운 방식의 발전과 새로운 나라 건설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호주)계 존 콘트레사스(75) 할아버지도 기대를 걸었다. “오늘 칠레의 미래가 결정되고 그 결실을 맺을 것”이라며 “그동안 상처받았던 칠레가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나아갈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날 투표 독려 티브이 광고는 2010년 33인의 광부 구출과 2016년 아메리카컵 축구대회 우승 등 최근 칠레에서 있었던 환호의 순간을 내보내며, 역사적 순간에 동참할 것을 독려했다. 구글 첫 화면은 이날 역사적 국민투표를 기념해, 칠레의 국기와 투표함 모양의 디자인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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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개헌 국민투표가 치러진 25일(현지시각) 수도 산티아고의 프로비덴시아에 위치한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손소독을 하면서 투표 준비를 하고 있다. 산티아고/김순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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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부독재 잔재, 수십년간 지배…지금까지는 ‘시장의 헌법이었다”


하지만 이날 모두가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하지는 않았다. 마스크 밖으로 흰 수염이 길게 삐져나온 하이메 바르가라(72) 할아버지는 “불필요한 일을 벌여서 원하지 않는데도 국민투표가 실시돼 투표하러 왔다”고 말했다. 할아버지는 “이미 새 헌법을 쓰겠다던 대선후보는 지난 대선에서 떨어졌고 혼란은 필요 없다”며 “피노체트 때 만든 헌법이 문제라는데, 헌법을 제대로 읽어보지 않은 젊은이들이 왜곡하고 거짓말을 한다”고 비판했다.

할아버지도 1988년 국민투표에서 피노체트의 집권 연장에 반대했다. 할아버지는 “당시는 피노체트가 15년이나 군사통치를 했으니, 민주주의 정부를 원했다”며 “헌법이 문제가 아니라 일을 해야 세금을 걷고 정부가 지원을 하지, 모든 걸 다 거저 주는 마법은 없다”고 비판했다. 자신을 로베르토라고 밝힌 할아버지도 “일부 정치세력이 무력으로 이런 상황까지 만들어서 필요 없는 일을 하고 있다”며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고 돌아섰다. 이날 투표감독관으로 일하던 파블로 루이스(38)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헌법을 새로 제정할지를 결정하는 의미 있는 투표에서 선거관리 업무를 맡게 돼 뿌듯하다”면서도 “지난해 이어진 시위와 혼란, 폭력 등에 반대한다. 새로운 헌법도 혼란을 가중시킬 것”이라며 새 헌법 제정에 반대했다.

의견은 갈렸지만, 모두 빠짐없이 마스크를 썼다. 칠레 영주권자인 나도 아침 9시20분, 제일 좋은 한국산 마스크를 골라 쓰고 투표소로 걸었다. 코로나19 탓에 투표소를 늘려, 투표소가 바뀌었다. 선관위 직원이 입구에서 나눠준 알코올 젤을 손에 바르고 학교로 들어섰다. 투표장 번호는 195V. 앞사람이 바깥으로 나온 뒤 들어섰다. 큰 거실 크기의 투표장에서 유권자 명단 앞에 신분증을 놓자, “킴(김), 파란색 볼펜을 갖고 왔어요?”라고 물었다. 펜을 통한 전염을 막기 위해, 각자가 펜을 가져오라고 해서 미리 사왔다. 2장의 투표용지를 손에 들었다. 흰색 용지는 헌법을 새로 제정할지 말지를, 베이지색 용지는 헌법 제정 기구의 구성방식을 물었다. 기표소는 천으로 닫히지 않고 트여 있었지만, 투표감독관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나도 칠레의 변화를 믿었다. ‘찬성’ 칸과 국민대표 100% 구성 칸에 위에서 아래로 쭉 선을 그었다. 기표 뒤 투표용지를 접어 배부받은 스티커로 붙인 뒤, 2개의 투표함에 각각 넣은 뒤 신분증을 돌려받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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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레 개헌 국민투표가 치러진 25일(현지시각) 수도 산티아고의 프로비덴시아에 위치한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시민들이 알코올 젤로 손소독을 하면서 들어가고 있다. 산티아고/김순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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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특별 생방송을 하던 텔레비전에서는 저녁 8시 투표 마감 뒤 곧바로 개표 중계가 시작됐다. 새 헌법 제정에 “찬성”이 나올 때마다 “브라보”가 터져나왔다. 반대표가 나올 때는 “우~” 야유가 흘러나왔다. 1988년 국민투표에서 1997년까지 피노체트의 집권을 연장할지 물었을 때, 54.7%는 ‘아니요’, 43.0%는 ‘예’에 투표해 민주화의 길을 선택했다. 32년 뒤 오늘, 훨씬 더 많은 칠레 국민들이 ‘민주화 이후 민주화’를 향한 새 헌법 제정을 선택했다. 그것도 불신받은 국회의원들을 제외하고, 국민들의 손으로 뽑은 새로운 대표가 헌법 제정의 주체가 되도록 했다. 그 길에서, 시위 현장의 ‘적’도 더 이상 서로를 적대시하지 않았다. 지난해 시위로 계엄령 선포 뒤 “군바리”라고 비난받던 군인들은 투표소 출입을 도왔다. 시위대를 무력진압한다고 “짭새”라고 욕먹던 경찰에게 대학생은 길을 물었고, 대학생은 군인의 안내대로 자전거를 세울 곳을 찾았다.

이날 새 헌법 제정에 찬성한 국민들이 원하는 미래는 확실하다. 모두 공정하고 기본권이 보장되는 칠레를 말했다. 친구와 같이 투표한 알렉시스 리소(47)는 “지금까지는 시장의 헌법이었다. 국민이 의료와 교육 등 기본권에 돈을 내고 경제적 수준에 따라 차별을 받았지만, 이제는 달라야 한다”며 “돈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좀 더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원한다”고 말했다. 세실리아 할머니도 “독재가 끝난 뒤 30년간 변화가 있었지만, 교육과 의료 등 더 공정한 세상을 만들기에는 아직 부족하다”고 더 나은 칠레를 기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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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있지만 하나씩 정해나갈 것” ‘민주화 이후 민주화’ 실현 갈림길


하지만, 새로운 헌법 제정에 찬성한 이들도 그 한계를 알고 있었다. 알렉시스는 “새로운 헌법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새 헌법의 내용을 놓고 갈등도 빚고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희망을 걸고 토론하면서 국민들이 하나씩 정해갈 것”이라고 말했다. 며칠 전, 교육의 자유와 권리를 놓고 벌어진 토론은 다가올 합의의 어려움을 잘 보여줬다. 부모가 자녀를 교육할 방식과 기관을 선택할 자유와 다양한 이념과 운영방식의 교육기관을 설립할 자유와 국가가 양질의 교육을 국민 모두에게 보장할 의무와 그 기본권을 보장받을 권리를 놓고 뜨거운 토론이 붙었다. “지금까지의 자유는 권리를 침해하는 자유였다”는 비판이 눈길을 끌었지만, 앞으로 헌법에 담을 내용을 놓고 치열한 토론이 벌어질 것이다. 칠레는 1973년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시작된 신자유주의적 모델과 그에 기인한 불평등뿐만 아니라, 구리 수출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국제 원자재 가격 하락에 따른 국가재정 악화, 페소화 가치 하락에 따른 물가 상승 등 대외적 요인까지 겹쳐 삶이 더 고단해졌다. 칠레대 사회학과 에마누엘 바로세트 교수는 22일 세미나에서 “국민들은 지금 당장 큰 변화를 원하지만 헌법을 바꾼다고 모든 사회문제를 바로 해결할 수는 없다”고 내다봤다.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 탓에 정부의 재정여력은 더 열악해졌고, 불평등은 더 악화됐다.

이제 칠레는 내년 4월11일 투표에서 제헌위원 155명을 새로 선출한다. 9개월간 헌법을 새로 쓰고, 필요하면 3개월 더 연장된다. 이후 2개월 뒤인 2022년 상반기 국민투표를 통해 국민이 다시 승인을 결정하게 된다. 2021년 11월 대선과 맞물려, 내년 하반기 칠레는 더욱 뜨거운 논쟁이 달아오를 것이다. 칠레는 이날 1990년 민주화 이후에도 독재의 잔재로 남았던 헌법을 역사 속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이제 토론은 그 낡은 헌법에 기초한 신자유주의 국가운영 모델을 어떻게 뜯어고치고, 지난 30년간 이루지 못한 ‘민주화 이후의 민주화’를 어떻게 실현할 것이냐가 될 것이다. 세바스티안 피녜라 대통령은 이날 저녁 “과거의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내다보자”고 강조했다. 지난해 시위로 뜨거웠던 산티아고의 이탈리아 광장과 칠레 곳곳에서는 승리의 축포와 환호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산티아고/김순배 통신원, 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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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순배 통신원(칠레센트랄대학교 비교한국학연구소장)이 25일 수도 산티아고의 프로비덴시아에 위치한 레히나 파시스 학교에 설치된 투표소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산티아고/김순배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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