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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9 (화)

[동서남북] 개천 용의 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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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 있는 속물들의 정의 수호… 드라마 ‘날아라 개천 용’ 인기

정의로운 척하다가 몰락한 현 집권 세력과 대비 이뤄

“판사든 검사든 심지어 대통령이든! 잘못했으면 뒤늦게라도 죄를 인정하고 진심으로 사과하면 된다. 뭐가 두려워 은폐하고 무마하려고만 하나.”

다소 화난 듯한 이 글은 인터넷 기사에 달린 댓글이 아니다. 지난 토요일 SBS 드라마 ‘날아라 개천 용’ 방송 중 시청자들이 올린 실시간 채팅 글의 일부다. 포털 연예 코너에 이례적으로 과격한 반응이 나온 것은 ‘정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는 현실을 고발한 내용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드라마는 실화에 바탕을 뒀다. 주인공인 재심 전문 변호사 박태용(권상우 분)은 억울한 사람들을 변론하며 일약 스타가 된 인물로 ‘삼례 나라슈퍼 삼인조 사건’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 사건’ 재심을 승소로 이끈 박준영(46) 변호사가 모델이다. 그가 맡았던 실제 사건들까지 이름만 바꿔 드라마에 그대로 등장한다.

눈길을 끄는 것은 주인공들이 남달리 대단한 정의감을 가진 인물로 묘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극 중 변호사는 억울한 사람을 돕겠다는 의욕이 넘치지만, 그걸로 유명해져 사건도 수임하고 돈도 벌고 싶다는 세속적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대놓고 “정의가 돈이 되는 세상을 보여줍시다”라고 외친다. 기자인 또 다른 주인공 박삼수(배성우 분)는 특종 기사를 물어와선 “(이걸로) 빌딩 올려주겠다”고 허풍을 친다.

직업상 정의를 추구해야 할 주인공들이 돈과 출세에 한눈파는 모습은 오히려 리얼리티를 더해주는 요소다. 대형 로펌의 스카우트 제의에 환호작약하고, 입만 열면 거짓말인 유력 정치인의 자서전 대필 요구에 마지못해 응했다가 결국 거절하는 모습은 직장에서, 그리고 가정에서 하루하루 고민하며 살아가는 소시민들과 닮았다. 그래도 이들은 항상 마지막에는 양심에 따라 정의의 편에 선다. 이는 묘하게도, 현 집권 세력의 모습과 대비된다. 페이스북에는 이런 후기도 올라왔다. “특별한 정의감으로 무장하고 대단한 집단인 양 행세하던 세력의 집권 후 도덕적 몰락을 지켜봐서 그런지… ‘그래, 우린 다 먹고사는 게 제일 중요한 속물들이지만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결단에서 양심을 따를 뿐’이란 캐릭터에 호감이 간다.” 항상 근엄한 얼굴로 정의와 공정을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이 그다지 정의롭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것이 드러났을 때 실망감은 더욱 커지는 법이다.

드라마는 ‘개천 용’의 복권(復權)도 시도했다.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의 이른바 ‘가붕개 행복론’으로 멸종 위기에 몰린 동물(?)을 당당하게 제목으로 썼다. 조 전 장관은 과거 “10대 90 사회가 되면서 용이 될 확률은 극히 줄었다. 모두가 용이 될 수 없으며…(중략) 더 중요한 것은… 개천에서 붕어·개구리·가재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이라고 소셜미디어에 썼다. 개천을 살기 좋게 바꾸자는 입바른 소리였으나, 그의 자녀 대학원 입시 관련 특혜 의혹이나 사모펀드 투자 관련 소문을 들은 사람들 사이에선 내심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는 반응이 나왔다. 반면, 이 드라마는 ‘내 자식이, 내가 용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갖는 게 결코 나쁜 것이 아니고, 비정상도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조국의 말[言] 같은 건 듣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이번 정권을 보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국민들 위에 군림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개천을 행복하게 만들겠다면서 자신들은 도통 구름 위에서 내려올 생각을 않는다. 광화문 집회를 주동했다는 이유로 청와대 비서실장이 국민을 ‘살인자’라 부르고, 여당 의원은 대법관인 법원행정처장한테 “의원님 살려주십시오 예산, 한번 하세요”라고 한다. 이런 오만한 태도는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거대한 착각에 빠져 있지 않으면 나오기 힘들다.

이런 집권 세력을 보면서, 코로나로 발이 꽁꽁 묶여 바깥 출입도 못 하고 입도 뻥긋 못 하게 된 국민들은 드라마에서나마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보며 위로받고 있다.

조선일보

사진=SBS 드라마 '날아라 개천 용'에서 박태용 변호사 역의 권상우(왼쪽)와 박삼수 기자 역의 배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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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흔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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