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기욱 인제대 교수]
2020년은 코로나19 팬데믹과 미국 대통령 선거의 해로 기억될 듯하다. 두 사건은 그 자체로도 '역대급'이지만, 세상을 바꿔놓는 거대한 변화의 서두처럼 느껴진다. 코로나19는 발발 이후 1년이 지난 오늘에도 잦아들기는커녕 어느 때보다 맹위를 떨치고 있으며, 이미 세계적으로 5500만 명의 확진자와 130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낳았다. 더욱이 기후변화는 폭염과 폭우, 초대형 산불과 홍수, 해수면 상승과 생물종 감소 등을 야기하며 지구촌 곳곳의 생태 환경을 삽시간에 변형하고 망가뜨리고 있어, 팬데믹보다 훨씬 더 큰 재앙이 될 듯하다. 물론 지구인들의 대응에 따라 상황은 달라질 테지만, 그런 대응이 유효한 시간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이런 시점에서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 바이든이 당선된 것은 천만다행이다. 그는 당선이 확정되자 곧바로 코로나 대응팀을 꾸리고 파리기후협약에 복귀할 뜻을 밝혔다. 또한 트럼프가 손상시킨 의료보험을 복원하거나 개선하고, 이민 규제를 완화하고, 부자 감세 조치 등을 손볼 것으로 보인다. 아시아계 흑인 여성 카멀라 해리스를 부통령으로 지명한 데서 나타나듯 인종, 젠더, 소수민족의 불평등한 현실에 대한 개선 의지도 보여주었다. 바이든의 당선이 확정되는 순간 미국의 거리에는 지지자들의 환호로 축제와도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한때 박빙의 접전까지 갔다가 확실한 승리를 거둔 데다 2016년 선거에서 힐러리가 빼앗겼던 펜실베이니아를 비롯한 '러스트벨트' 경합주들을 되찾은 것도 뜻깊었다.
그러나 차분히 짚어보면 이번 대선을 통해 미국 민주주의의 건재함이나 희망스러운 미래를 실감하기는 어렵다. <뉴욕타임스>, CNN 등의 진보언론은 바이든의 압승을 예고했다가 개표가 시작되면서 곤혹스러운 현실에 직면했다. 한 정치평론가가 토로하듯, 트럼프가 지난 4년간 그렇게 거짓말과 망나니짓을 대놓고 했는데도 "이렇게 접전이라는 사실 자체가 뼈아픈 것"이다. 불편한 현실은 만약 코로나19와 인종 차별 항의 시위가 없었더라면 바이든이 트럼프를 이기기 힘들었으리라는 것, 총 투표에서 바이든이 550만 표가량 앞섰지만, 패자인 트럼프도 자신이 승리한 2016년 선거 때보다 1000만 표 이상 많은 득표를 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유권자들은 바이든을 선택했지만, 그렇다고 트럼프와 그 특유의 포퓰리즘을 거부한 것은 아니다.
특히 심상찮은 것은 트럼프의 득표 중에 라티노, 흑인, 아시아계, 무슬림, 심지어 백인 여성의 표까지 2016년 때보다 더 늘었다는 사실이다. 게다가 의회 선거에서 민주당은 기대한 압승은커녕 오히려 밀렸다. 현재 공화당은 상원에서 1석을 잃었지만 하원에서는 오히려 8석을 더 얻고 있다. 말하자면, 다양한 인종 및 소수 민족 기층민들은 트럼프의 방역 실패와 인종 차별 항의 운동에 대한 적대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바이든과 민주당 쪽으로 몰려가지 않았다. 지난 20년 사이 배가된 부의 양극화 폐해를 직접적으로 겪어온 그들에게 바이든과 해리스가 역설하는 민주주의의 덕목들, 평등·자유·정의·예의·가능성·진실은 별로 소구력이 없다. 이들 중 다수는 공화당 못지않게 친기업적인 민주당 주류가 이런 이상들을 내세우는 것을 기만적이라고 느낀다. 이 같은 저변의 정치적 움직임에 주목하면, 미국의 민주주의 체제는 지금 심각한 위기 국면임이 분명하다.
네이오미 클라인(Naomi Klein)의 <가디언> 기고문(11월 8일 자)은 미국 사회가 트럼프가 몰고 온 '파시즘의 쓰나미'에 휩쓸릴 위기에 처해 있다고 진단한다. 선거 전략에 따라 바이든이 트럼프를 패배시킬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 여겨져 후보가 되었지만, "바이든은 이렇게 깊은 위기에 처한,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줄 게 너무 적기 때문에" 사실은 '위험한 후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클라인의 주장대로 과연 샌더스(B. Sanders)가 덜 위험한 후보였는지, 그리고 민주당 좌파가 "파시즘의 쓰나미를 저지하는 제방" 노릇을 하면서 미국 사회 재건의 대안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바이든 정부가 둘로 쪼개진 미국 사회의 분열과 대립을 얼마나 '치유'할 수 있을지도 지켜볼 일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바이든이 오바마 시절의 타협적 정치 방식으로 돌아가는 것으로는 치유도 어려울뿐더러 위험하기까지 하다는 점이다.
새 대통령을 뽑았으나 현직 대통령이 별 근거 없이 불복하는 기이한 광경을 접하면서 촛불 시민의 힘으로 현직 대통령을 탄핵시키고 새 정부를 출범시킨 한국의 혁명적 경험이 절로 떠오른다. 촛불을 경험한 한국 시민들에겐 대선 불복도 어처구니없지만, 최악의 코로나 참사를 초래하고도 비과학적 언행을 일삼고 인종차별·성차별 발언을 예사로 하는 대통령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민주주의의 희망과 문명의 가능성을 미국보다 한국에서 찾을 때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렇다고 한국이 마냥 잘하고 있다는 뜻은 아니다. 전지구적 생태 위기가 확연해지면서 그 위기의 근본 원인에 해당하는 자본주의적 생산 및 축적 방식 자체가 바뀌어야 하는 시점에서 미국과 한국은 뿌리는 같되 각이한 양상의 과제를 마주하고 있다. 바이든 행정부가 트럼프가 훼손하고 파괴한 민주주의적 가치와 제도를 복원하면서 '트럼프주의'라고 불리는 '파시즘적 흐름'을 저지하고 극복하는 쪽으로 힘을 쏟아야 한다면, 이미 그런 흐름을 저지하면서 탄생한 한국의 '촛불 정부'는 적폐 청산과 아울러 생태 위기와 경제 문제를 적절히 감당하면서 남북 관계를 새로운 단계로 끌어올려 분단 체제 극복의 돌파구를 열어나가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촛불 혁명은 완성될 것이다.
이런 중차대한 과제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각 분야 전문가의 견해를 존중할 필요가 있지만, 시민들 각각의 구체적인 삶에서 나오는 소리에 귀 기울이며 새로운 제안을 과감하게 채택함으로써 촛불의 창의적 기운을 이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정부와 여당이 재벌과 관료 등 기득권층의 눈치를 보면서 코로나 사태로 벼랑 끝까지 내몰린 저소득 노동자층의 안전과 생계를 챙기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촛불의 활력을 짓밟는 것에 가깝다. 세제 개혁 하나 힘있게 추진하지 못하면서 부족한 예산을 핑계로 과감한 구제책을 펼치지 않는 것은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켜 더욱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일이다. 정부와 여당이 개혁에 이렇게 미온적인 것은 시대 변화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실감이 결여된 탓도 있다. 지금의 한국은 경제 규모로 보나 민주화의 척도로 보나 권위주의적인 개발도상국 시절과는 딴판인데, 그때의 발상과 모델에서 제대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전태일 열사 50주기'를 맞은 마당에 노동자들의 억울한 죽음이 이어지고 있는데도 최소한의 안전장치랄 수 있는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놓고 갈팡질팡한다든지, 성장주의적 모델에 안주해서 화석연료 발전을 계속 허용하는 것도 노동·생태 윤리의 위반이자 시대 착오다. 부동산 문제는 난제이긴 하지만, 여기서도 정책 입안자들이 '요즘 사람들은 너무 돈만 밝힌다'고 나무랄 게 아니라 돈에 대해 과도하게 집착하지 않고도 뜻있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실효적인 주거 정책 모델을 내놓아야 한다. 도시개발 시대의 규제/완화 모델에 입각해서 '더 강력한 규제'를 들먹이는 대신 '기본주택' 같은 새로운 모델을 시험할 필요도 있다.
끝으로, 바이든 정부 출범으로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의 재정립이 당면 과제로 대두했는데, 이 분야는 연륜과 내공을 갖춘 전문가들이 많은 데다 대통령 자신의 경험과 굳건한 의지도 있어서 좋은 기회를 맞이할 것으로 기대한다. 이미 여기저기서 지적하듯 그간 우리가 일궈낸 소중한 성과를 지키지 않고 '전략적 인내'라는 예전의 모델로 되돌아가는 것은 무책임하고 위험하다. 국내 문제가 더 화급한 바이든 정부가 한반도 문제에 손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분석이나 어차피 대외전략팀이 갖추어지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측도 예전의 발상 아닌가. 우리는 이명박·박근혜 정권이 집권하던 오바마 시절의 우리가 아니며, 그동안 달라진 중요성과 비전에 합당한 발의권을 미국과 중국, 일본, 심지어 북한을 상대로도 당당히 요구하며 스스로도 과감하게 추진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은 <창작과비평> 2020년 겨울호 '책머리에'의 일부입니다.
[한기욱 인제대 교수]
- Copyrights ©PRESSia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