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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토)

이슈 미술의 세계

몸집 1㎝ 주인공, 보셨어요?…작고 약한 존재가 가장 큰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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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그림책 작가들의 ‘돌파하는 힘’

(8) 노인경

1㎝ ‘소소’, 일회용 비닐봉지

사소하고 연약한 존재가 주인공

“답답한 나를 위해 만든 책들”

국내외 독자들 공감 속에 호평

성실과 공감능력이 작가 장점

“다른 존재들 감정 잘 전해져”

난관 극복하고 평화로운 결말

“눈을 뜨고도 꿈을 꾸고 싶어”


한겨레

노인경 작가가 남편과 함께 운영하는 디자인 회사 사무실에서 인터뷰 질문에 답하고 있다. 뒤로 아들 아루(6)가 쓴 손글씨가 보인다. 해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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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는 소설 <등대로>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일상적 경험의 차원에서 이건 의자고 저건 식탁일 뿐이라고 느끼는 동시에 이건 기적이고 저건 희열이라고 느끼는 거야.’ 매번 다짐한다. 일상의 권태에 지지 말자! 소박한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사람이 되자! 하지만 이벤트로 가득한 타인의 삶이 사방에서 번쩍인다. 나의 사소함은 곧잘 시시함의 동의어가 된다.

바깥의 소식에 흔들리는 날엔 노인경 작가(42)의 그림책을 연다. <기차와 물고기>(2006)로 데뷔한 이래 국내는 물론 프랑스, 중국, 아랍에미리트 등 외국 독자에게도 사랑받는 9권의 창작 그림책을 발표한 작가.

그의 책을 열면 함부로 시들해지려는 마음에 제동을 거는 작은 주인공들을 만날 수 있다. 작가가 “나의 분신”이라 말하는 <책청소부 소소>(2010)의 주인공 ‘소소’는 몸집이 1㎝다. 도서관 책장 꼭대기에 살면서 책 속 인물들의 속엣말을 들어주고, 단어가 품은 공감각적 뉘앙스를 세세하게 감지한다.

소소의 시선을 빌리면 매일 쓰는 낱말도 새롭다. <나는 봉지>(2017)의 주인공은 일회용 비닐봉지이다. 쉽게 쓰고 버려지는 일상의 사물도 노인경 작가의 시선이 닿으면 자기만의 서사를 가진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막 세상에 도착한 어린이 ‘아루’(<사랑해 아니요군>(2019))의 눈으로 본 의자와 식탁은 기적과 희열 그 자체다.

신선함, 비범함, 강함에 끌리긴 쉽다. 익숙함, 평범함, 연약함을 사랑하긴 어렵다. 권력 다툼에 끼어본 적 없는 작은 존재들의 느린 움직임을 관찰하고 진심으로 감탄하는 마음을 닮고 싶었다. 지난해 12월27일, 노인경 작가가 이탈리아인 배우자이자 제품 디자이너 다니엘레 테스타와 함께 운영하는 디자인 회사 ‘비-온크리에이티브’ 사무실에서 대화를 나누었다.

한겨레

브라티슬라바 국제원화전시회(BIB) 등 권위 있는 국제 그림책 상을 수상한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 번역본들. 아빠 코끼리가 가뭄이 든 초원에서 양동이에 물을 길어 아기 코끼리들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을 담은 이야기로 양동이 속 물방울의 개수를 독자가 셀 수 있도록 픽셀 아트 방식을 취했다. 해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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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두렵게 하는 것들 정체 알고 싶었어요”




―홍익대 시각디자인 전공, 이탈리아 국립미술원 유학, 브라티슬라바 국제원화전시회 수상, 뮌헨 국제어린이도서관 ‘화이트 레이븐’과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선정, 초등 국어 교과서 수록, ‘서울시 한 도서관 한 책 읽기’ 선정까지 이력이 대단합니다.



“대학교 2학년 때 일을 시작해 큰 굴곡 없이 지금껏 왔어요. 무척 감사한 일인데, 선정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응? 왜지?’ 싶었어요. 5남매 중 셋째로 자라면서 ‘너라도 평범히, 너라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내내 들었어요. 쉽게 작아지는 사람이라 질문과 걱정이 끊이지 않고, 작은 표현에도 커다란 용기가 필요하고,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어색함을 느껴요. 심리적 어려움이 커지면 그 정체를 바라보려고 그림책을 지어요. 아버지와 화해하고 싶어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2012)을 지었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의 감옥을 부수고 내 세계를 스스로 짓겠다는 다짐으로 <고슴도치 엑스>(2014)를 만들었어요. <곰씨의 의자>(2016)에는 솔직한 자기표현을 과도하게 어려워하는 저의 답답한 성격이 고스란히 담겨 있고요. 모두 저 자신을 위해 만든 책인데, 연령이나 국적과 관계없이 소통된다는 점이 신기해요.”

―시각디자인 전공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진로가 많았을 텐데, 왜 출판을 선택하셨나요?



“저는 자동차를 타고 갈 때 잘 놀라요. 나의 속도가 아니라 장치의 속도니까요. 저는 걷는 속도가 맞는 사람이에요. 책은 느리고 보수적인 매체예요. 그림책은 얇고 짧아서 독자가 만만하게 자주 꺼내 볼 수 있지만, 시간이 흘러도 가치가 크게 변하지 않아요. 저는 순발력보다는 지구력이 있고, 엄청나게 많이 그려보고 버리는 식으로 작업해요. 무척 성실한 편이에요. 그런 면에서 그림책 출판과 속도가 맞아요.”

―빨리 성과를 내라고 독촉하는 내면의 목소리는 없나요?



“이익과 성과를 낼 수 있다면 과정은 아무래도 괜찮다는 문화가 한국 사회에 분명 있지요. 대학교 1학년 때 아이엠에프(IMF)가 터졌어요. 저 역시 한국 사회의 일원이기에 제 안에도 내면화된 목소리가 있어요. 쉽게 결과를 보고 싶은 마음과 오래 싸움을 벌였어요. 여전히 조바심을 다스리는 중이지만, 이제는 손으로 실행해보면서 오류를 맞닥뜨릴 때의 희열을 알아요. 계속 실패를 맛봐야 해요. 오류와 실패는 내가 넘어지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그때에만 찾아오는 깨달음이 분명 있거든요. 예민하고 소심한 편이라 항상 덜덜 떨면서도 계속 넘어지려고 해요. 궁금하거든요. 나를 두렵게 하는 것들의 정체를 알고 싶어요.”

―2015년 출산 이후 발표한 <나는 봉지>, <숨>, <사랑해 아니요군>은 이전 작업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이전 책들이 주제 의식을 잘 전하기 위해 치밀하게 이야기를 조직한 느낌이었다면 최근작은 힘을 쭉 빼고 순간을 수집한 느낌을 줍니다.



“육아를 병행하느라 실제로 힘이 없어서 그래요.(웃음) 그림 그리는 양이 자신감의 근원이던 작가인데, 육아하면서는 시간이 정말 없더라고요. 그때 만든 책이 <나는 봉지>예요. 딱 8절 크로키지, 12색 수채 물감, 색연필 두자루, 연필만 사용한 책이에요. 수채화는 처음이었는데, 도구가 간소하고 특별한 준비가 필요 없어서 당시 제 상황에 맞았죠. 매일 밖으로 나가서 유아차 속 아이가 잠들면 공원 벤치에 앉아 스케치를 하고, 밤에 색을 입혔어요. 체력적으로 힘에 부쳤지만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었어요. 한장에 5분 이상 쓰지 않으면서 한 획으로 쓱쓱 그렸어요. 망치면 버리고 다시 그렸어요. 미리부터 대안을 1부터 5까지 준비하던 과거와 많이 달라진 작업 방식이었어요. 원화만 200여장이 나왔는데, 64장을 추려 <나는 봉지>를 만들었어요. 당시엔 현실적 제약 때문에 수채화를 선택했지만, 색이 겹겹이 쌓이고 투명하게 면을 채우는 성질이 저와 잘 맞아서 이후로도 계속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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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육아에 매여 있던 2016년 무렵 작업한 <나는 봉지> 스케치. 사진에 보이는 색연필 두자루, 연필 한자루, 작은 수채 물감 팔레트만 사용해 작업했다. 낮에는 유아차를 밀고 공원에 나가 스케치하고, 아이가 잠든 밤에 틈틈이 채색했다. 쉽게 쓰고 버려지는 사물의 일생에 대해 숙고했던 작품. 해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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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봉지> 작가의 말에 이렇게 쓰셨어요. “많은 것들이 너무 쉽게 사용되고 버려지고 잊혀지고 있습니다. 가끔 살아 있는 것들도요.”

“제 책에는 작거나 약하거나 눈에 띄지 않는 존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요. 그림책은 아이들만 보는 책은 아니지만, 분명 아이들을 향해요. 기성 사회의 중심에 서본 적 없는 존재를 향하지요. 그런 아이들은 모든 것의 입을 찾아내 대화하고 문을 찾아내 들어가요. 쉽게 상처를 얻지만, 금세 회복하는 치유 능력도 있어요. 아들 아루를 양육하면서 삶의 기본을 다시 생각할 때가 많아요. 아이가 내뱉는 단순한 말에 담긴 진실, 반짝이는 순간을 흘려보내고 싶지 않아서 기록해요. 일주일에 노트를 한권 정도 쓸 정도로 열심히 수집하고 있어요.”

사소한 순간을 알아보고 감탄할 때


―생활 속 메모가 <사랑해 아니요군>의 근간이 되었지요. “단순하고 반복되는 날들의 차이를 발견해요”라는 문장이 나오는데요, 왜 이런 작은 차이를 발견하고 기억하려 노력하시나요?

“일상적 대화가 저를 감동시킬 때가 많아요. 다른 사람들은 알아채지 못하지만, 저는 볼 수 있는 상황이 있어요. 어떤 대화는 짧은데도 하루 종일 따뜻한 느낌을 품게 해요. 되새기다 피식 웃는 대화도 있지요. 그런 사소한 순간을 알아보고 감탄할 때 저는 잘 산다고 느껴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어떤 순간일까요?

“변기 앞은 아이와 대화하기 좋은 장소예요. 물 내림 손잡이를 누른 다음 물이 차오를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손잡이를 계속 누르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줬어요. “아루야, 변기가 물이 채워지는 중인데, 조금 채워졌을 때 네가 누르잖아? 그럼 계속 안 채워진다? 얘도 시간이 필요해.” 아이를 향해 말하면서 저도 듣지요. ‘인경아, 육아에 얽매인 듯 보이지만, 너도 지금 채워지려고 기다리는 거야. 조급해하지 마.’”

―아이가 장난쳐서 힘들 수도 있는 상황인데, 변기 앞에서도 지혜를 찾아내시는군요.

“이전 작품에서도 의자, 양동이, 가시 등 일상 속 사물을 은유의 재료로 자주 사용했어요. 작은 연극 무대처럼 한정된 상황을 제시하고 나라면 어떨까 상상해보는 걸 좋아해요. 나를 제3자로 바꾸어보거나 제3자를 나라고 진지하게 생각해요. 성실함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저의 강점이 공감 능력일 거예요. 다른 존재들의 기쁨과 아픔이 잘 전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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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 겪은 에피소드, 상대방의 표정과 말투, 좋았던 글귀 등을 일단 모두 노트에 적어놓고 정기적으로 다시 살펴보면서 책에 쓸 만한 소재를 솎아낸다. 해란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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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 주인공들은 난관을 마주하지만, 이내 갈등과 긴장이 해소되고 평화롭게 책이 끝나요. 안심시키는 서사가 그림책 특유의 낙관성을 만들지만, 한편으로는 허약한 희망 아닌가 싶을 때도 있어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도 모두 해피엔딩을 꿈꿔요. 그러나 행복감은 순간일 뿐 지속되지 않아요. 지구의 자전 같은 진리예요. 좋은 날이 지나가고 나쁜 날이 와요. 그러면 나쁜 날이 지나가면 좋은 날이 온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해요. ‘앞으로도 나쁜 날밖에 없을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나쁜 날을 보내는 것과 ‘좋은 날이 올 거야’ 믿으면서 나쁜 날을 보내는 건 전혀 다른 삶이라고 생각해요. 그림책의 해피엔딩은 우리가 어둠을 통과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좋은 날에 대한 기억을 심어줘요. 용기를 내면 분명 무언가 달라진다는 믿음과 함께요. 낙관성을 담아내는 일이 곧 가벼움이 되지 않도록 주인공이 세계를 긍정하기까지의 과정을 고심하며 잘 보여주려고 노력해요.”

―그림책이 현실에 밀착하지 않아서 깊이가 없다는 의견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얼마 전, 아룬다티 로이의 소설 <작은 것들의 신>을 읽으면서 눈물을 쏟았어요. 연약한 존재들을 둘러싼 수많은 악을 현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라 읽는 내내 비참하고 슬펐어요. 그런데 책을 덮을 땐 이런 마음이 들더라고요. ‘사랑하고 보듬고 연대하고 싶다, 작은 것들을 지켜내고 싶다, 다정함은 얼마나 소중한가.’ 펼쳐내는 방법은 다르지만, 저도 그런 마음으로 그림책을 만들어요. 현실은 중요해요. 그런데 사람은 꿈 때문에도 살아지거든요. 그 세계는 가짜가 아니에요. 언젠가 몽상하지 않는 나를 상상해본 적이 있어요. 심심하고, 뻔하고, 슬펐어요. 저는 눈을 뜨고도 꿈을 꾸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진실하다면 깊이는 자연히 생길 거라 믿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인생 그림책’을 소개해달라는 요청에 노인경 작가는 패트릭 맥도넬의 <고마워요 잘 자요>를 꺼냈다. 어둠을 마주한 아이의 불안에 답하는 잠자리 그림책. 내일 또 다른 하루가 이어질 거라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여러 이야기를 들려주던 책 속 화자는 마지막에 질문한다. “잠들기 전에 오늘 행복했던 일 말해볼까?” 아이가 대답한다. “해님, 달님, 빨간 풍선, 숨바꼭질, 친구들과 재미있게 놀던 일, 별똥별 보며 소원 빌기, 그리고 편한 잠옷, 신나고 설렜던 잠옷 파티, 작은 새의 노래….”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작은 기쁨의 목록을 따라 읽는데, 명치 안쪽이 따끔따끔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나만의 목록 만들기를 시도해보았다. 서너개쯤 이어가다 이내 머리가 하얘졌다. 사느라 그렇다는 핑계로 내가 내팽개친 현실이 무엇이었나 돌아보곤 정신이 아득해졌다.



노인경 작품 목록

2006년 <기차와 물고기> 문학동네

2010년 <책청소부 소소> 문학동네

2012년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 문학동네

2014년 <고슴도치 엑스> 문학동네

2015년 <너의 날> 책읽는곰

2016년 <곰씨의 의자> 문학동네

2017년 <나는 봉지> 웅진주니어2018년 <숨> 문학동네

2019년 <사랑해 아니요군> 이봄

대표작

<곰씨의 의자>

작가 소개

“바게트처럼 수수한 그림책”을 만든다고 겸손히 설명하지만, 작품마다 그림체, 재료, 제책 요소를 전부 바꾸며 실험하는 작가. 픽셀 아트로 만든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로 브라티슬라바 국제원화전시회(BIB) 황금사과상 등 권위 있는 그림책 상을 다수 수상했고, 애니메이션 제작을 고려할 정도로 디테일한 세계관을 구축한 <고슴도치 엑스>로 2015 뮌헨 국제어린이도서관 화이트 레이븐에 선정되었다. 6살 아들 아루를 양육하며 쉽게 감동받고, 쉽게 흥분하고, 쉽게 반성하는 엄마이기도 하다.





최혜진. 사람을 인터뷰하는 에디터이자 미술과 문답한 과정을 글로 쓰는 작가. <그림책에 마음을 묻다>, <우리 각자의 미술관>,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등을 썼다. 삶에 위로를 받고 싶을 때면 늘 그림책이 곁에 있던 것을 생각하며, 한국의 그림책 작가들과 ‘세상을 돌파하는 힘’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눠보고자 한다. 격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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