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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3 (금)

“BTS·K방역 성공, 청년실업·부동산 문제…모두 ‘쌀문화’의 유산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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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세대’ 잇는 신작 ‘쌀, 재난, 국가…’ 출간한 이철승 교수

[경향신문]



경향신문

이철승 교수는 26일 <쌀, 재난, 국가> 출간 간담회에서 “임금체계를 고치지 않으면 공정성 이슈는 영원히 해결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불평등의 세대> 출간에 맞춰 한 강연에서 한 젊은이가 “선생님, 저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요”라고 울먹이며 던진 질문이 책을 쓴 동기가 됐다고 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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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뭄·역병 대비하는 구휼국가
공동생산 위해 협업하는 노동조직
벼농사는 긍정적 유산을 남겼지만
학벌주의·여성 배제·땅 집착 등
불평등구조와 경쟁·비교 문화 낳아

“이 책이 접근하는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반도체, 자동차, BTS를 무엇이 만들었을까’라는 쌀 문화의 긍정적 유산. 그리고 ‘쌀 문화가 현대의 여러 문제들의 구조에 영향을 미쳤을까’라는 부정적 유산. 한국 사회의 발전과 불평등에 대해 동시에 답하고자 했습니다.”

2019년, 386세대의 과점(寡占)을 비판하며 새로운 불평등 담론을 제시한 <불평등의 세대>로 주목받은 이철승 서강대 사회학과 교수(50)가 신작 <쌀, 재난, 국가 - 한국인은 어떻게 불평등해졌는가>(문학과지성사)를 출간했다. 전작에서 한국 사회 위계 구조가 어떻게 ‘세대’와 맞물리며 불평등을 야기해왔는지 펼쳐보였다면, 이번 책에선 불평등의 깊은 구조로 ‘벼농사 체제’를 제시한다. 한반도에서 고대국가가 형성되던 시기부터 현재의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까지 훑어 내려오며 동아시아 쌀 경작 문화권의 유산들이 어떻게 오늘날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문제 등 불평등을 형성했는지 각종 자료와 데이터 분석으로 풀어낸다. 이 교수는 26일 서울 중구 한 식당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책 제목의 쌀, 재난, 국가라는 키워드는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며 “한국 사회의 불평등 구조와 경쟁·비교의 문화가 어디서 왔는지에 대한 역사적 분석”이라고 말했다.

잘 익은 벼가 물결처럼 찰랑거리는 평야. 물을 채워놓은 논에서 크는 벼는 매우 높은 생산성을 자랑한다. 하지만 논은 가뭄에 취약하다. 물이 부족하면 벼는 말라 죽고, 먹을 것이 부족해져 사람들이 들짐승을 잡아먹으면 역병이 돌기 시작한다. 장마와 태풍은 연례행사처럼 한반도를 덮친다. 이런 악순환에도 국가가 세금만 걷어가면 어떻게 될까. 동아시아를 수천년 동안 주기적으로 휩쓴 반란과 혁명이 등장한다. 홍수와 가뭄, 역병이 휩쓸지 않도록 하고, 물을 다스리는 역할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마을보다 큰 세력. 이것이 동아시아 재난 대비 국가의 기원이다.

이 교수는 벼농사 체제의 유산을 일곱 가지로 정리한다. 재난에 적극 대응하는 재난 대비 구휼국가, 공동생산을 위해 협업하는 공동노동 조직, 협업하에 진행되는 표준화의 힘이 긍정적 유산들이다. 반면 나이에 따른 서열 문화와 연공급 위주 노동시장, 여성 배제 사회구조, 시험을 통한 선발 및 신분 유지와 숙련의 무시, 땅과 자산에 대한 집착 및 씨족 계보로 상속이 이루어지는 사적 복지체제는 부정적 유산으로 꼽힌다.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성공적인 코로나19 방역도 ‘벼농사 체제’로 설명된다. 이 교수는 “심하게 말하면 동아시아 정치체제에서 팬데믹 대응은 기본이다. 못하면 정권퇴진이고, 잘하면 본전”이라고 했다. 더 나아가 “마스크를 안 썼다고 승차거부를 하면 미국에선 총을 맞을 일인데 한국 사회는 눈살을 찌푸리며 간섭한다”며 “역사적으로 쌀 경작 문화에서 서로 눈치를 보는, 일종의 상호감시 체제가 발전해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 경제 구조적 위기 혁신 위해
연공서열 문화 철폐가 가장 중요”

벼농사 체제 특성상 협력의 문화가 발전할 수밖에 없고, 이는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세계적 성공을 이끌었다. 반면 농토는 제한적이기에 격렬한 수확량 경쟁에 돌입할 수밖에 없고, 서로의 생산물 차이에 극도로 민감한 문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를 ‘공식적인 민주주의 영역’에서 몰아냈음에도 여전히 ‘위계의 그물’ 속에서 사고하며 행동하고, 그토록 잘 협력하면서도 때로는 왜 격렬하게 목숨을 걸고 경쟁하는 것일까. 이 같은 한국인의 ‘이중성’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이 교수는 “객관적 지표로 보면 한국 사회가 그렇게 불평등하지 않음에도 불평등과 공정성에 극도로 예민한 이유를 쌀 문화로부터 기원한 경쟁과 비교 문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며 “여기에 토지를 얻을 수 있고 권력과 연결될 수 있는 ‘과거제도’가 벼농사와 착종되면서 학벌주의가 심해졌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이번 책에서도 연공서열의 위계에 대한 비판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청년 일자리 위기와 한국 경제의 구조적 위기를 혁신하기 위해서는 ‘연공 문화’ 철폐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정규직을 양분하고, 윗세대에 여유 자금을 쌓는 연공제가 ‘세대 네트워크’와 ‘인구구조’와 얽히면서 청년실업과 비정규직 차별, 여성 배제, 부동산 문제의 구조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결국 연공제를 철폐하자는 주장인데 시장에선 노동 유연화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민감한 문제”라며 “안전망이 부족한 한국에서 고용 유연화까지 나아갈 순 없고 임금 유연화를 통해 최대한 일자리 기회와 파이를 나눠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단순하게 말하면 다 같이 연공제를 하지 말고 무기계약직으로 가자는 것”이라며 “그 과정에서 임금의 차이를 가져오는 인센티브는 ‘숙련’에서 찾아야 하고, 숙련에 대한 평가 문화가 정착되면 그만큼 시험과 학벌의 중요성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산업화 시대 부모 세대의 성취를 박정희 대통령의 공으로만 돌리는 데서 벗어나는 것도 저술 동기였다”며 “오늘날 세계화된 민주주의 사회에서 벼농사 체제의 유산들 중 협업의 기예는 강화시키고 위계는 약화시키기 위한 고민을 담았다”고 말했다.

배문규 기자 sobbell@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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