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팅 치는 데 돈 안 내도 됨, 강화할 때 장비 파괴 안 됨, 각종 특수효과 기간 제한 없음….”
어떤 게임 이용자들에게는 당연한 이 내용이 그동안 다른 어떤 게임 이용자들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게임 내에서 사용되는 아이템은 물론 아이템에 붙는 ‘추가옵션’ 하나하나를 돈을 내는 ‘뽑기운’에 따라 손에 넣을 수밖에 없었던 ‘메이플스토리’ 게임 이용자들의 이야기다. 이 게임은 2003년 국내에서 첫 서비스를 시작한 이래 지난 1월까지도 국내 PC방 점유율 순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꾸준한 인기를 얻어왔다. 그러나 메이플스토리를 위시해 국내 유명 게임사들의 게임들이 확률 조작 문제와 과도한 현금 결제 유도 행태 때문에 논란의 중심으로 떠오르면서 이용자들이 대거 이탈하는 등 여파가 커지고 있다.
논란은 지난 2월 18일 넥슨이 메이플스토리 게임 업데이트 내용을 홈페이지에 공지하면서 불거졌다. ‘아이템에 부여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추가옵션이 동일한 확률로 부여되도록 수정한다’는 공지 문구를 본 이용자들이 “지금까지 동일한 확률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걸 넥슨이 자인했다”며 들고 일어난 것이다. 게임에서 이용자들이 일정 금액을 내고 자신이 보유한 무기의 성능을 강화할 수 있도록 한 점은 다른 게임에서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확률형 게임 아이템의 일종인 ‘랜덤박스’를 국내 도입한 원조로 꼽히는 메이플스토리는 이미 수년 전부터 ‘확률 조작’ 의혹을 받아왔던 탓에 파급 속도도 빨랐다. 넥슨 측이 바로 다음 날 “추가 옵션을 부여하는 게임 내 로직이 잘못돼 수정하는 것”이라고 밝혔지만 이미 이용자들의 분노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진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2월 2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메이플스토리 이용자들이 게임 내 아이템 확률 공개를 요구하며 트럭 시위를 벌이고 있다. / 메이플스토리 인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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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도한 현금 결제 유도 행태 논란
이와 같은 사태는 이미 전부터 불씨를 안고 있었다. 넥슨의 또 다른 게임인 ‘마비노기’ 이용자들도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명확한 정보를 내놓으라며 항의시위를 벌였을 뿐 아니라 넷마블이 국내 서비스를 맡은 ‘페이트 그랜드 오더’ 아이템 지급 행사 중단과 관련해 해당 게임 이용자들이 전광판 트럭까지 끌어와 시위를 벌이는 등 올해 들어 게임 이용자들의 거침없는 항의가 촉발된 바 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선 국내 대형 게임사들이 게임을 즐기기 위해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는 충성도 높은 이용자들을 이른바 ‘호구’로 인식하고 찬밥 대접한다는 불만이 누적돼왔다.
불붙는 사태에 기름을 부은 것은 한국게임산업협회가 낸 의견서였다. 국회에서 게임 내 확률형 아이템에 대해 확률 고시를 의무화하는 내용을 포함한 ‘게임산업진흥에 관한 법률 전부개정법률안(게임산업법 개정안)’이 발의되며 공론화가 시작되자 해당 협회는 “해당 게임의 개발자들도 그 확률의 정확한 수치를 알 수 없는 경우도 있다”는 황당한 답변을 의견서에 포함시켰다. 그동안 확률 자율공개를 이행하고 있다는 게임업체들이 자신들도 정확한 확률을 모른다는 모순된 입장을 발표하면서 빈축을 산 것이다. 협회 측은 이후 슬그머니 문제가 된 문구를 삭제해 의견서를 수정했지만, 이러한 움직임을 두고 확률형 아이템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린 국내 대표적인 게임업체 ‘3N’ 넥슨·넷마블·NC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라고 보는 비판적 시각도 더욱 강해졌다.
게다가 해당 사태에 대응하는 게임사 관계자들이 언론에 업계 입장을 밝히며 “게임을 공짜로 즐기려는 유저가 많아지면서 내놓은 고육지책”이라거나 “유저의 결제 태도가 좋지 않다”는 식의 속내를 비쳤다고 알려지기도 했다. 자신이 즐기는 게임 분야를 넘어 거의 모든 게이머가 “국내 게임사를 손봐야 한다”고 단결하게 만든 셈이다. 사태 진화 대신 논란만 가중시키는 업계 내부 분위기를 두고 한 게임사 관계자는 “유저를 돈줄로만 보고 최대한 뽑아내려는 태도가 업계 안에 어느 정도 퍼져 있는 건 사실이지만 최근에는 그 어느 때보다 눈치를 살피고 있기도 하다”면서 “한두명의 말실수로 업계 전체에 피바람이 불게 되는 것이 두렵다”고 말했다.
■이용자들 트럭 몰고 사옥 앞 시위
게임 이용자들은 물론 게임업계 안팎에서도 확률형 아이템 규제를 포함한 게임산업법 전면 개정을 미뤄선 안 된다는 목소리는 더욱 높아지고 있다. 게임 내에서 이용자가 원하는 아이템이 나오기를 기대하며 돈을 내고 뽑기를 하는 과금 유도 자체를 문제삼진 않더라도 그동안 뽑기 확률이 어느 수준인지 공개해야 한다는 요구는 지속적으로 나왔다. 업계에서는 자율적으로 확률을 공개하고 있다고 밝혀 왔으나 지난 19·20대 국회에서 확률 공개를 의무화하는 법안이 결국 폐기된 바 있어 사실상 업체마다 자신들이 공개하고 싶은 범위에서만 공개해왔기 때문이다. 위정현 한국게임학회장(중앙대 교수)은 “게임사가 신고하는 확률이 정확한지 확인할 방법도 없고 설사 위반했다고 하더라도 불이익을 줄 방법 역시 없다”며 “확률형 아이템에 대한 이용자의 반발은 사회적인 파장을 일으키게 되고 이렇게 되면 게임의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직접적인 규제가 들어올 수도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게다가 이번 21대 국회 들어 해당 법률 전부개정안을 대표발의한 이상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안을 보면 사실상 문화체육관광부가 지난해 2월 공개한 개정안과 대동소이하다. 해당 개정안에는 확률형 아이템의 정보공개 의무화와 같은 이용자들의 숙원이 담긴 규제도 들어 있지만, 등급분류 절차 간소화와 중소 게임사 자금 지원, 경미한 내용수정신고 면제 등 업계 측 요구도 상당 부분 반영돼 있다. 2월 24일 국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전체회의에서도 임재주 수석전문위원은 “게임 사행성 조장 방지와 이용자 보호를 위한 확률형 아이템 표시 의무, 해외 게임사업자의 국내 대리인 지정 등은 중장기적으로 게임산업 경쟁력을 강화하고 건전한 게임문화를 확립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긍정적인 의견을 냈다.
확률형 게임 아이템을 둘러싼 업체와 이용자 간의 정보 비대칭 문제는 단순히 ‘확률조작 의혹’을 제기하거나 해당 게임을 그만두고 다른 게임으로 이동하는 차원을 넘어 오프라인에서의 집단행동으로 번지고 있기 때문에 일반 여론의 주목도도 더욱 높다. 대표적으로 트럭에다 크게 항의 문구를 적어 게임사 주변 등에서 시위를 벌이는 방식은 확률형 아이템 때문은 아니지만 지난 1월 ‘페이트 그랜드 오더’ 국내 서버 이용자들이 불만족스러운 운영방침 개선을 요구하며 시도한 이래 빠르게 자리 잡았다. 이상헌 의원은 “최근 게임 이용자들이 트럭 시위, 청와대와 국회 청원, 의견서 전달 등을 통해 과거보다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드러내고 집단행동을 하고 있는데 협회는 이를 외면하고 있다”며 “게임 이용자들은 현행 자율규제가 구색맞추기 식에 불과하다며 지속적으로 법제화를 요구해 왔다”고 말했다.
김태훈 기자 anarq@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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