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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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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본, 다른 일본] 코로나19에 걸린 ‘시마 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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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장수하는 일본의 콘텐츠를 생각하다
편집자주: 우리에게는 가깝지만 먼 나라 일본. 격주 수요일 연재되는 ‘같은 일본, 다른 일본’은 현지 대학에 재직 중인 미디어 인류학자 김경화 박사가 다양한 시각으로 일본의 현주소를 짚어보는 기획물입니다.
한국일보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 중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장수한 작품이 제법 있다. 일본의 장수 콘텐츠를 보며, 우리나라 콘텐츠 생태계가 창작자가 오랫동안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일러스트 김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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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로나19에 걸린 시마 과장

‘시마 과장’이 코로나19에 걸렸다고 한다.

‘시마 과장’이 누구인고 하면, 1983년 일본의 대표적인 출판사 코단샤가 발행하는 만화 잡지에 연재를 시작한 장수 만화 시리즈의 주인공이다. 시마 코사쿠(島 耕作)라는 이름의 주인공이 과장으로 승진하면서 “이제 평사원이 아니라 관리직”이라며 마음을 다잡는 첫 에피소드가 인상적이었다. 주인공의 기상천외한 여성 편력은 과하다 싶으면서도, 기업 내 파벌 투쟁, 동종 기업 간의 치열한 경쟁, 시장 개척을 위해 해외에 부임하는 에피소드 등 일본 기업의 실상이 제법 생생하게 담겨 있다. 한국에도 독자가 적지 않다. 40년 가까이 연재되면서 주인공은 꾸준히 승진했고 만화의 제목도 업그레이드했다. ‘시마 부장’, ‘시마 상무’, ‘시마 전무’, ‘시마 사장’, ‘시마 회장’을 거쳐 지금은 노익장의 ‘시마 상담역(相談役)’으로 스토리가 계속되는 중이다. 부장, 상무, 사장은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지만, ‘상담역’은 생소할 듯하다. 일본식 한자어를 그대로 옮기면 ‘상담역’이지만 우리나라 조직에서의 고문(顧問) 정도로 이해하면 무난하다. 말하자면, 회장도 이미 졸업한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 현역 경영진에게 조언하고 상담해 주는 보직이다. 뚜렷한 역할도 없이 연장자에게 권위와 편의를 제공하는 자리라고 해서 일본에서도 존폐 당위를 두고 말이 많다. 어찌 되었든 일본의 조직 문화 전통에서 승진으로 갈 수 있는 임원 중의 ‘끝판왕’이다. 만화 속 허구라고는 해도, 평사원에서 시작해 이 자리에 도달한 시마 코사쿠는 ‘일본 샐러리맨의 전설’이라고 불릴 만하다.

바로 그 ‘시마 과장’(지금은 ‘시마 상담역’)이 최근 연재된 에피소드에서 코로나19에 걸렸다는 것이다. 만화 속 상황이지만 실제 인물이 코로나19에 걸린 양 뉴스로도 소개가 되었다. 73세인 시마 상담역은 20년 동안 금연한 건강 체질이지만,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를 나눈 옛 부하 직원으로부터 감염되었다. 카레 맛이 안 느껴지는 것을 수상히 여겨 PCR 검사를 받았더니 양성으로 판명되었다. 증상은 가벼워서 요양 시설로 쓰이는 시내 호텔에 입소한다는 설정이다. 작가 히로카네 켄시(弘兼憲史)에 따르면 기업을 경영하는 지인이 실제로 코로나19에 감염된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는데, 코로나19 시대를 사는 일본 회사원의 실상을 생생하게 반영하고 있다. 그는 오락 만화라고 해도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창작 소신을 줄곧 밝혀왔다. 현실에서 소재를 찾는 성실함이 이 만화가 장수한 비결이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

◇천수를 누리는 일본의 콘텐츠

일본의 만화나 애니메이션 중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장수한 작품이 제법 있다. 1969년에 방영이 시작된 <사자에 씨>(サザエさん・후지TV, 일본어로는 ‘사자에 상’이다)는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전파를 탄 TV 애니메이션 부문에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도쿄에 사는 평범한 가족의 일상을 담담하게 그린 만화로 일요일 오후 6시 30분이라는 방영 시간도 한번도 바뀌지 않았다. 반 세기가 넘게 꾸준히 자리를 지킨 콘텐츠인 것이다. 워낙 오랫동안 방영되어서 일본의 사회 현상을 읽는 지표로 자리매김될 정도다. 예를 들면 ‘사자에 상 효과’라는 말이 있다. 한 민간연구소가 이 애니메이션 시청률이 오르면 주가가 떨어지고 시청률이 떨어지면 주가가 올라가는 상관 관계를 밝혀내고 이렇게 이름을 붙였다. 경기가 좋으면 주말의 가족 외출이 늘어 TV 시청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또 ‘사자에 상 증후군’이라는 말도 있다. 일요일 오후에 방영이 끝나면 주말이 다 지나갔다는 생각에 우울해지는 심리 현상을 이렇게 부른다.

일본처럼 콘텐츠가 천수를 누리는 곳이 또 있을까. 미국의 TV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 (The Simpsons)도 1989년에 처음 공개된 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대표적인 롱런 작품이다. 하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인 1990년 방영이 시작된 TV 애니메이션 <꼬마 마루코>(ちびまる子ちゃん・ 후지TV)는 이제 겨우 서른 살이 넘었을 뿐, 일본의 장수 콘텐츠 중에서는 젊은 축이다. 1980년대에 한국에서 크게 히트한 ‘아기 공룡 둘리’나 ‘달려라 하니’ 등은 오래 전에 추억 속 콘텐츠가 되었다. 반면, 일본에서는 ‘도라에몽’(1969년), ‘토토로’(1988년), ‘호빵맨’(1988년) 등 관록의 캐릭터가 2010년 이후에 출생한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인기 순위를 다툰다. ‘포켓몬스터’(1996년)나 ‘원피스’(1999년) 등 1990년대생 콘텐츠도 애니메이션, 게임, 각종 굿즈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현역으로 대활약 중이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의 포털 사이트에서 미디어 섹션을 만드는 일을 했다. 지금은 콘텐츠 플랫폼으로서 포털의 위상이 굳건하다. 당시에는 검색이나 온라인 커뮤니티 플랫폼을 지향하는 포털이 콘텐츠를 배포하는 미디어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자는 제안에 사내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기성 창작자들은 포털에 작품을 제공할 의향도 없어서 고군분투했다. 온라인 게시판 여기저기에 자작 만화를 올리던 ‘재야’ 창작자의 콘텐츠를 포털 사이트에서 정식으로 연재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그 설익은 시도가 ‘웹툰’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는 첫 걸음이었음을 실감하지 못했다. 그 때에 인연을 맺은 창작자들이 지금은 웹툰계의 원로 대접을 받는 것이 기쁘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그 때 주목받던 콘텐츠 중에 지금까지 건재한 것이 전무하다시피 한 상황은 애석하다. 당시에 선풍적으로 인기를 끌었던 ‘졸라맨’, ‘엽기 토끼 마시마로’, ‘스노우캣’은 지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뽀로로’, ‘펭수’ 등 새로운 콘텐츠의 매력에 밀려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수십 년 동안 천수를 누리는 일본의 콘텐츠와 비교하자면 참 빨리도 세상을 등졌다.

◇창작자가 오래 활약하는 콘텐츠 생태계를 고민해야

모든 콘텐츠가 오래오래 살아남아야 좋은 것은 아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는 말도 있듯 창작의 세계는 새로움을 무기로 삼을 필요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맛을 더하는 콘텐츠도 있다. ‘시마 과장’이나 ‘사자에 씨’처럼 오랜 세월을 같이해 온 콘텐츠는 대체 불가능한 편안함과 재미를 준다. 연극에 투신한 천재 소녀의 이야기를 그린 일본 만화 <유리 가면>(ガラスの仮面・하쿠센 출판)은 1976년에 연재가 시작되었는데 아직 결말이 나지 않았다. 시마 시리즈처럼 꾸준히 작품이 나온 것이 아니라, 작가가 휴재를 거듭하는 와중에 수십 년이 지났다. 1980년대에 한국어 해적판도 유통된 작품으로 한국에도 숨은 팬이 꽤 있을 터, 고백하자면 나 역시 그 중 한 명이다. 몇 년 전 머지 않아 최종 편이 나온다는 소문이 돌았었다. 서둘러 온라인 쇼핑몰에서 구매 예약을 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 예약 이벤트에 참가한 친구들이 제법 있었다. 뜻대로 창작이 진행되지 않았던 듯, 일 년 넘게 기다려도 결국 최종 편은 발간되지 않았고 구매 예약은 취소 처리되었다. 안타까운 맘이 없겠냐마는, 수십 년을 기다렸는데 몇 년 더 보태는 것이 대수겠는가. 팬심은 쉽게 고갈되지 않는 법이다. 다양한 대중문화와 일상을 함께하는 현대인에게 장수 콘텐츠는 그 존재만으로도 즐거움을 준다.

창작은 정신적 역량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재능과 의욕이 넘쳐도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계속하기 어렵다. 때문에 창작자의 사명감이나 개별 작품의 수준을 따지기 전에 작가가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콘텐츠 생태계를 조성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대박’은 나온다. 하지만, 콘텐츠 생태계가 건강하지 않으면 천수를 누리기는 어렵다. 오랜 세월 변함없는 즐거움을 주는 일본의 장수 콘텐츠를 보며, 우리나라의 콘텐츠 생태계가 창작자가 오랫동안 활약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 있는지 새삼 돌아보게 된다.

김경화 칸다외국어대 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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