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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목소리 좀 내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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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김선희의 학교 공감일기

공교육의 본질을 회복하려면


한겨레

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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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희. 김선희!” “…….”

초등학교 2학년 때 빈 교실에 남은 나를 향한 선생님의 호명에 응답하지 못했다. 나는 극빈 가정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자랐고, 잔뜩 주눅이 들어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 채 함구증 같은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종업식 날 담임 선생님은 모든 아이를 하교시킨 후 나를 남겼다. 대답 없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선생님은 말했다. “김선희, ‘네’라고 한번만 말해봐. 선생님이 1년 동안 가르쳤는데, 네 목소리 한번은 들어봐야 할 것 아니야. 목소리 좀 내봐. 응?” 선생님의 간절한 눈빛에 떠밀려 가까스로 “네” 하고 답했다. 순간 교실 속에서 존재하는 나 자신을 인식할 수 있었다. ‘아, 내가 여기에 있구나.’ 교실이라는 커다란 세상에 비로소 나라는 존재가 하나의 점으로 그려 넣어진 최초의 확인이었다. “말할 줄 아네. 3학년 되거든 선생님과 친구들이 부를 때 대답 크게 하고 발표도 해봐. 네가 할 수 있다는 거 다 알고 있어.” “네.” “그래, 앞으로 잘 지내.” 선생님은 교실 앞문을 열고 나를 배웅했다. 2부제에 한 학급 70명이 넘는 당시의 열악한 환경에서 한 아이를 따로 바라보는 각별한 기회를 만드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 보답하듯 3학년에 진급한 나는 차차 내 목소리를 사용하며 느리게나마 다른 친구와 연결될 수 있었다. 잘나고 힘 있는 아이들에게 가려진 위축되고 남루한 한 존재의 소중함을 인식한 선생님의 고귀한 마음은 지금껏 내 기억 속에 뚜렷이 남아 교실 한편에 있는 듯 없는 듯 소리 없이 지내는 소외된 아이들의 마음을 비추는 등불이 되고 있다.

정신건강의학 전문의 정혜신은 ‘커다란 슬픔에 빠진 한 이웃의 에스엔에스(SNS) 글에 압도되어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는 누군가의 고백에 ‘댓글을 달기 힘들거든 점 하나라도 찍으라’고 권했다. 그로써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님’을 인식할 수 있으며, 다른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극한 고통으로 인한 고립감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에 잠시 눈길을 주는 행동은 나조차도 절뚝거리는 삶 속에서 내 앞에 놓인 한 존재가 다른 한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한다. 그것이 바로 각자도생의 척박한 사회에서 불안하고 힘없는 존재들이 세상과 융화하기 위해 서로에게 건넬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사랑의 실천인 것이다.

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공교육의 이념과 기회균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는 산증인이다. 빈민가의 알코올중독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어른, 욕설하며 악다구니 쓰는 어른, 무기력에 빠진 어른, 맞고 때리는 아귀다툼 같은 일상을 살아가는 어른과 전혀 다른 어른을 지속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학교뿐이었다. 교사의 단정하고 깔끔한 모습을 통해 막연하기만 했던 괜찮은 인간상을 구체적으로 바라며 꿈을 키운 것이다. 학대와 방임의 지옥 같은 환경의 나조차 배움을 놓지 않고 더 나은 삶을 추구하여 이룰 수 있었던 것은 건강한 한 어른과 연결되어 있게 한 학교라는 안전한 울타리에 속한 덕분이었다.

과거와 달리 오늘날은 절대적 빈곤을 겪는 학생들이 대폭 감소했다. 그러나 상대적 박탈감이나 마음의 허기로 힘든 삶을 이어가는 아이들은 오히려 더 많다. 꽤 많은 아이가 과열 경쟁교육으로 인한 과로와 마음의 상처로 시들시들 말라가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이들은 교사를 절대적으로 우러르고 따른다. 교사가 품은 마음과 생각은 아이들을 통해 우리네의 미래 환경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는 한 사회를 새롭게 디자인할 수 있는 매우 영향력 있는 존재다. 자율성을 보장받는 교사의 높은 자존감은 아이들의 건강한 시민의식으로 승계된다. 경쟁교육으로 인한 입시관리 중심 학교체제에서 행정관리 기능이 더 강조되는 가운데 위축된 교사 본연의 정체성 회복이 시급하다. 참스승, 백기완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세상의 가치가 더 희미해지기 전에 교육 불안을 부추기는 경쟁교육을 멈추고 공교육 본질의 건강성을 회복하기 바란다. 이는 머지않아 시대적 약자가 될 우리 세대의 안정된 미래를 가꾸는 일이기도 하다.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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