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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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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더P] 'MB의 남자' 박형준, 보수논객 활약 뒤 부산시장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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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국민의힘 부산시장 후보로 선출된 박형준 후보가 4일 서울 여의도 국민의힘 중앙당사에서 열린 서울-부산시장 후보 경선 결과 발표회에서 후보 수락 인사를 하고 있다. [이승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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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부산시장 후보인 박형준 전 의원은 1960년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 상경해 초·중·고를 모두 서울에서 다녔다. 숭덕초등학교,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중학교, 대일고등학교를 거쳐 1978년 고려대학교 문과대 사회학과에 입학한다.


학생운동 경험…대학교수

박 전 의원은 2004년 월간 잡지 인물과 사상에 기고한 글에서 스스로 "80년대에 나는 분명 좌파였다"며 학생운동에 몸담았던 경험을 직접 밝혔다. 고려대에 입학한 뒤 문예반에 들어간 그는 교지(校誌)인 '고대문화'의 편집장을 지냈다. 당시는 학생운동이 활발하던 시기였고 그 역시 학생운동에 나섰다. 1980년 서울역 시위 당시엔 고대 시위대 행렬에 앞장 서기도 했다. 시청 앞에서 연좌시위를 하던 그는 전경들을 피해 프라자 호텔 인근으로 도망갔다가 오른쪽 눈에 최루탄을 맞았다. 그 탓에 실명에 가까울 정도로 시력의 상당 부분을 잃었다.

부동시로 군면제를 받은 박 전 의원은 1982년 대학을 졸업한다. 이후 중앙일보에 입사해 1년 6개월 가량 기자 생활을 경험한다. 다시 모교인 고려대로 돌아가 1985년 사회학 석사, 1992년 사회학 박사 과정을 졸업한다. 1991년엔 동아대 사회학과 교수에 임용된다. 그가 대학원에 다니던 1980년대 중반부터 학생운동권엔 이른바 '민족해방(NL) 운동'이 널리 퍼진다. 이와 함께 '주체사상파'가 등장하는데 박 전 의원은 이 때부터 운동권과 거리를 두게 된다.

그는 기고에서 "주사파와 이른바 'NL'이 등장하고 확산되던 그때 나는 참으로 당혹스러웠다"며 "마르크스를 열심히 읽었던 나로서는 주체사상을 도저히 마르크스주의라고 생각키도 어려웠을 뿐 아니라 현실의 북한 전체주의를 인정한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현실의 사회주의 체제를 연구했고 동구권 사회주의체제가 총체적 실패였음을 분명히 알게 됐다"고 밝혔다. 박 전 의원은 이 당시 공산권 국가들을 방문하면서 사회주의체제에 대해 다양한 연구를 했다.


YS·친이계 인맥 형성

정치활동을 시작한 것은 1990년 민중당 창당에 참여하면서부터다. 박 전 의원은 노동정당을 표방한 민중당의 창당 강령을 만드는데 기여했다. 당시 민중당 상임대표는 이우재 전 의원, 사무총장은 이재오 전 의원이었다.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김용태 전 의원, 김성식 전 의원, 차명진 전 의원 등도 함께했다. 이후 한나라당에서 활약하게 될 이른바 '친이명박계' 인사들과의 인맥이 이때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1992년 14대 총선에서 민중당은 1석도 얻지 못하며 실패를 겪는다.

한편 1993년 14대 대선에서 당선된 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외연 확장의 일환으로 노동운동·재야운동 인사들 영입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보수여당인 민주자유당에 개혁성을 더하기 위해서였다. 이에 1994년 이우재, 이재오 전 의원, 김문수 전 지사 등 민중당 인사들을 대거 민자당으로 영입한다.

박 전 의원은 YS의 자문 정책기획위원으로 참여한다. 1994년 '시드니 구상'으로 불리는 YS의 '세계화 구상'은 박 전 의원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박 전 의원은 이 때의 경험이 본격적으로 정치에 뛰어든 계기가 됐다고 밝혔다.

과거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이 되기 전까지만해도 제도권 정치인이 되는 것엔 관심이 없었으나 "YS개혁이 의도와 결과가 왜 달라지는가를 보면서 국가경영능력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보수정당에 쓴소리

1995년 YS는 5·18 특별법 추진과 함께 전격적으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구속에 나선다. 그리고 민자당은 신한국당으로 당명을 변경한다.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하고도 3당 합당으로 탄생한 당명을 그대로 가져갈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후 민자당은 1997년 15대 대선을 앞두고 통합민주당과 합당해 한나라당이 된다.

이 시기 박 전 의원은 교수로서 외곽에서 활동하며 보수당을 향한 쓴소리를 했다. 대선에서 패배한 한나라당은 위기 탈출을 위해 개혁 노력을 기울였고 그 일환으로 1999년 '뉴밀레니엄위원회'를 출범했는데 첫 토론회에 발제자로 나선 박 전 의원은 당시 이회창 총재를 향해 "이 총재의 리더십과 비전은 '반(反) 3김'이라는 것 외에 긍정적인 자기정체성이 국민적으로 각인돼 있지 못하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 2002년 대선 패배 이후 열린 한나라당 개혁특위 워크숍에선 "영남권 지지를 총선으로 연결하려는 전략에 빠져선 안된다"며 " 총선을 앞두고 노무현 정권의 조기실패를 기대하고 대립의 정치를 펼치려는 유혹은 떨쳐버리고 책임있는 원내 제1당으로서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고 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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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소장파 의원

박 전 의원의 첫 선거 도전은 2004년 17대 총선이었다. 당시 한나라당 부산 지역의 현역 의원들은 다수가 고령에 다선이었다. '물갈이' '용퇴론'과 맞물려 정치 신인 발탁이 필요하단 목소리가 나왔다. 그러던 중 부산 수영구를 지역구로 둔 4선의 유흥수 의원이 불출마와 함께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박 전 의원의 나이는 44살이었고 개혁적인 목소리를 내왔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카드였다. 그는 단수 공천을 받는데 성공했고 58.8%의 득표율로 승리한다.

이후 박 전 의원은 당내에서 대표적인 개혁·소장파로 활동한다. 당선 직후 이성권, 김희정 전 의원과 함께 '부산 소장파' 3인방으로 불렸던 그는 당내 개혁성향 의원모임인 '수요 모임'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당시 이 모임엔 원희룡 제주지사, 권영세 국민의힘 의원, 남경필 전 경기지사 등이 참여하고 있었다.

2005년 7월부터는 수요모임의 대표를 맡으면서 당내 비주류모임의 중심이 됐다. 당시 한나라당의 주류는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을 필두로한 영남권 인사들이었다. 지금은 '비박'인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는 당시 사무총장을 맡으며 친박계로 활동했다.

2006년 서울시장이었던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당으로 복귀하면서 본격적으로 '친이' 대 '친박' 경쟁이 시작된다.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박 전 의원은 이 전 대통령 캠프에 합류해 이 전 대통령의 대리인으로 활동한다. 'MB의 남자'로서 인연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다.


MB의 남자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이 당선을 이끈 박 전 의원은 2008년 18대 총선에 출마한다. 17대 총선 때와 같은 부산 수영구에서 재선을 노렸으나 '무소속 친박' 후보인 유재중 전 의원에 밀려 낙선한다. 이후 2008년 6월 대통령 비서실 홍보기획관에 임명되면서 청와대에 입성한 그는 'MB의 브레인' 역할을 한다.

2009년 9월부터는 정무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은 '중도실용'과 '친서민'을 새로운 기조로 내세웠는데 여당내 중도·소장파 의원들과 소통을 강화하기 위해 박 전 의원을 기용한 것이다.

한편 2010년 6월 정부, 여당이 추진한 '세종시 수정계획'이 국회에서 부결되면서 청와대 쇄신론이 대두됐고 박 전 의원은 정무수석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2011년 1월 이명박 대통령은 박 전 의원을 다시 청와대로 불러들였다. 그는 12월까지 대통령 사회특별보좌관으로 활동한다. 박 전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의 임기 3분의2 이상을 청와대에 몸담으며 'MB의 남자'라는 평가를 받게된다.

청와대를 나온 그는 2012년 19대 총선에서 또 다시 부산 수영구로 출마한다. 그러나 당시 한나라당은 친박계가 세력을 잡아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변경하고 새출발을 한 상황이었다. 친이계인 박 전 의원은 공천에서 탈락했고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또 다시 유재중 전 의원에게 밀려 패배한다. 이후 야인 생활을 하다 2014년부터 2년 간 국회 사무총장을 지냈다.


보수논객으로 활약

그는 2017년부터 '보수 논객'으로 활약한다. 방송 시사프로그램에 출연해 유시민 노무현재단 이사장, 이철희 전 의원과 토론을 벌이며 차분하고 합리적인 보수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문재인 정부 출범 초기였는데 정권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보수층의 마음을 대변하는 역할을 했다.

박 전 의원은 교수 출신답게 저술활동도 활발히 했다. 2014년 발간한 ‘한국사회 무엇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 박형준의 공진국가 구상'에서 그는 정치 개혁이 국가 발전 모델의 핵심이 돼야 한다며 분열과 대립의 정치에서 벗어나 '협력적 경쟁'이 국가 진화의 원동력이 돼야한다고 주장했다. '중도'와 '개혁'을 중시해온 그는 당시 책을 출간하면서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친박'과 '친노' 세력을 보수와 진보, 여와 야 극단에 있는 강경파 그룹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보수진영이 좀처럼 지지율 회복을 못하고 위기가 이어지던 2019년엔 ‘보수의 재구성'이란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서도 그는 "태극기 부대로 상징되는 세력과 촛불혁명을 내세우는 세력 사이엔 넓은 정치적 공간이 존재한다"며 '사이 공간'에 있는 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보수가 새로운 기획을 내놓아야한다고 했다. 그는 이를 위해 개인의 행복에 집중하는 한편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결별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부산시장 도전

박 전 의원은 21대 총선을 앞두고 보수 통합을 위해 역할을 한다. 2020년 1월 보수·중도 진영의 정당 및 시민단체는 야권 통합을 위한 통합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박 전 의원을 위원장에 추대한다. 자유한국당과 새보수당으로 갈라진 보수를 봉합하고 이른바 '보수 빅텐트' 만들기 위한 기구였다.

한달 간의 진통 끝에 자유한국당과 새보수당은 '미래통합당'으로 합당했다. 박 전 의원은 통합당의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는다. 그러나 코로나19 확산 위기감으로 여권 지지세가 상승하고 당내선 막말 논란 등 악재가 겹치면서 통합당은 총선에서 참패한다.

한편 총선 직후 터진 '오거돈 성추행 사태'로 오 전 부산시장이 사퇴하고 부산시장 보궐선거가 확정되면서 박 전 의원은 야당 부산시장 후보로 떠오른다. 9월부터 본격적으로 출마 의지를 피력한 그는 한달 뒤 국민의힘으로 복당한다.

이후 12월 공식 출마선언에서 그는 "정권을 바꾸고 리더십을 교체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도 없다"며 "정권교체와 리더십 교체에 힘이 되는 시장이 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국민의힘의 부산시장 보궐선거 후보가 됐다.

[이석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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