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 총격 사건’의 희생자들은 누구였나
미국 애틀랜타 총격 사건의 희생자들은 늘 더 나은 삶을 바랐다. 8명의 희생자 중 한인 4명을 포함한 아시아계 6명은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고국을 떠나 미국에 발을 디뎠다. 상당수는 영어가 익숙지 않아 저임금 일자리를 전전했다. ‘싱글맘’으로 혼자 두 아이를 키워야 했기에, 미국인 남편과 이혼하면서 혼자 가계를 책임져야 했기에 이들 대부분은 경제적 어려움에 빠졌다. 하지만 이들은 현재의 위치에서 열심히 일하는 것만이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한다고 믿었다.
희생자 중 한 명인 유영애씨(63)는 지난 16일(현지시간) 일하다 총격에 숨을 거뒀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의 아들 로버트 피터슨은 지역매체 애틀랜타 저널 컨스티튜션에 “엄마는 지난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해고됐는데 일자리를 다시 구하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며 “엄마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고 했다.
유씨는 1970년대에 주한미군이었던 남편을 만나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했다. 슬하에 두 아들을 뒀다. 하지만 얼마 후 남편과 이혼했고, 이후 식료품점 계산원 등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려갔다. 유씨의 전남편인 맥 피터슨은 뉴욕타임스에 “그녀는 좋은 엄마였다. 항상 아이들을 위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희생자 김순자씨(69)도 가족을 위해 헌신했다. 그는 1980년쯤 가족과 함께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다. 김씨의 가족은 뉴욕타임스에 “그는 미국 이민에 대해 물어볼 때마다 ‘아이들에게 더 나은 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왔다’고 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김씨의 미국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언어가 익숙지 않아 여러 직업을 전전해야 했다. 첫 직장이었던 텍사스 군부대 식당에서는 설거지를 했다. 편의점과 부동산 회사에서 일할 때는 임금을 조금이라도 더 받기 위해 늦게까지 남아 청소를 했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김씨는 다른 사람을 돕는 데 많은 시간을 썼다. 1998년 한국의 외환위기 때는 한국의 아이들을 돕기 위해 비영리단체에 지속적인 기부를 했다. 봉사와 기부 활동으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 대통령 자원봉사상을 받기도 했다.
싱글맘으로 두 아들을 홀로 키웠던 희생자 현정 그랜트(한국명 김현정)의 아들 랜디 박은 “엄마는 평생을 내 동생과 나를 기르는 데 헌신한 미혼모였다”고 했다.
그가 사연을 올린 기부 플랫폼 ‘고펀드미’에는 21일 오후까지 250만달러 이상의 기부금이 모였다.
중국에서 이주한 샤오지에 탄(44)과 다오유 펑(44)도 같은 날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탄은 입버릇처럼 “우린 기회를 잡으러 온 거야”라고 말하며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 일했다고 한다.
탄의 전남편은 워싱턴포스트에 “극도로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자 착한 사업가”라고 말했다.
이효상 기자 hsle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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