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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이슈 미술의 세계

마이크로 어버니스트(micro urbanist), 건축가 정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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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효 아키텍트-82] 디아건축사사무소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텅 비어 있다. 왼쪽 상단 구석에 작은 글자로 네 칸으로 나뉜 사무소 소개 인트로(intro)가 있을 뿐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원고를 쓰면서 추가 질문을 하기 위해 정현아 건축가 카톡을 열었다. 중국 작가 치바이스(薺白石·1860~1957) 작품 한쪽에 있을 법한 초가삼간이 화려한 벚꽃 동산 중턱쯤에 걸쳐 있는 이미지가 뜬다.

정현아는 세계 경제의 심장이자 미술·건축·디자인의 수도인 뉴욕에서 공부하고 로버트 스턴 건축사무소(Robert A.M. Stern Architects)에서 실무를 거쳤다. 로버트 스턴은 지역적인 건축 전통을 계승한 공간과 형태를 지향한다.

"건축은 굉장히 로컬한 작업이다. 도시의 역사, 문화와 깊은 연관이 있다. 외국의 교육과 실무는 우리 현실과 판이하다. 건축가에 대한 개념과 정의도 다르다. 이러한 다름을 배워 우리 사회, 특히 밀도 높은 도시 건축에 내재된 그 무엇, 낯섬과 뜨내기 같은 것들을 건축가로서 극복하고 싶었다."

그 최적의 장소를 서울 강남으로 지목하고 2005년 사무소를 열었다. 1970~1980년대에 본격 개발된 강남은 자본의 논리가 지배한다. 주택 용도로 지은 집들이 사무실, 다시 카페, 상점으로 개조된다. 선배들은 서구 건축을 베끼기에도 벅찼다. 스승이 많지 않았고, 대부분 건축을 형태로만 이해하고, 구조, 안정성 등 본질에는 이르지 못했다. 자신은 이러한 현실을 소화해 우리 것으로 만드는 소임이 있다고 봤다.

논현동 앤샵(N#), 대지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과하게 가파른 골목길이었다. 개발 시대에 만든 블록 내부 도로가 지형과 무관하게 생긴 직선 격자를 극복하는 게 과제였다. 대지를 조성하기 위해 만든 높은 옹벽을 여러 개의 수평판(plane)으로 세웠다. 옹벽을 해체하고 건물과 경계를 없애 옹벽도 건물의 일부로 다뤘다. 세워진 판들 사이로 틈새를 두어 거리와 통하게 했고, 그에 면한 급한 경사로에 보행 계단을 공공에 내주었다. 건물 내부 계단과 달리 외부 계단은 삶과 밀착한 저잣거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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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동 앤샵(N#) /사진=신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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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감독의 영화 '중경삼림'에는 옥외 에스컬레이터가 창으로 바짝 붙은 작은 아파트 공간이 나온다. 주인공 페이 역의 왕페이는 경찰 663역의 양조위 전 애인이 전해달라는 아파트 키로 663의 공간을 종종 몰래 청소한다. 그 작은 창으로 페이는 스쳐 에스컬레이터를 오른다. 실루엣과도 같은 이야기가 전개될 수 있는 마당 같은 계단인 것이다.

소규모 임대 건물에서 주어진 프로그램은 지극히 단순하고 사용자가 특정되지 않아 공간의 요구는 구체적이지 않았다.

해가 져도 일상이 연장되는 대도시 저잣거리와의 접촉면을 최대화해 답을 구했다. 도로에 접한 면의 7m에 가까운 높이 차는 건물이 거리와 만나는 지면을 두껍게 다루는 단초가 됐다. 가장 완만한 쪽으로 주차 출입을 해결하고 낮은 지면 쪽에서는 지하층으로 바로 연결했다. 지하1, 2층과 1층, 2층까지 거리에서 직접 진입할 수 있다.

도로 폭에 비해 높이가 높아 골목 밀도와 조율이 필요했다. 비좁은 대지에 건폐율 범위 내에서 적극적인 외부 공간을 만드는 것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건물을 분절해 거대한 매스로 보이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돌·나무·콘크리트·금속 등 재료 하나의 단위 모듈은 잘게 나눴다. 두꺼운 석재 외벽과 대조되도록 유리창 부분은 최대한 안으로 밀어 넣었다.

서로 다른 크기와 질감을 가지는 독립적인 판들이 사용자가 이동함에 따라 분리되거나 겹쳐지며 건물 외피에 깊이를 부여한다.

벌려놓은 판 사이에 의도적으로 동선을 놓았다. 저층부의 일자 계단은 기준층에서 돌음계단(spiral stair·回階段)으로 바뀌었다가, 사옥으로 쓰이는 상부층에 이르면서 다시 풀어진다. 이는 법규 제한선에 대응하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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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동 녹음스튜디오 / 사진=신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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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현동 녹음스튜디오는 주택가가 형성돼 있는 도산대로 안쪽에 위치한다. 남향의 68평 모퉁이 대지는 일조 및 도로 사선(斜線) 이격 등에서 많이 불리했다. 이격 거리 제한에 한 치의 여유도 없을뿐더러 주변 다세대 주택과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건축주는 임대 수익이 목적이 아니고 자가 사용 목적이 더 컸기에 건축주 실사용 공간과 임대공간을 어떻게 분리 혹은 관계시킬지 고민이 필요했다.

일조 사선형 매스를 피하고자 계단실을 이용했다. 일자 계단을 따라 매스를 점차 줄여 층층히 접히는 형상을 취했고, 각 층 계단실에 천창을 만들었다. 녹음스튜디오라는 기능은 외벽의 오프닝을 제한하고 외장재로 주변 다세대처럼 벽돌을 쓰되, 거친 표면을 잘라낸 파벽돌을 사용해 그 자리에 있어온 건물처럼 보이게 했다.

녹음실이 위치한 2~3층은 창이 적은 외벽을 구조체로 이용해 기둥 없는 공간으로 하고, 4~5층 사무실은 구조의 하중을 줄이고자 가벼운 투명박스로 하였다. 상부 하중을 1층 주차장의 V자 철골기둥이 받치며 지하 RC(Reinforced Concrete, 철근콘크리트) 기둥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다세대 주택 블럭에 근린생활시설 건물을 넣으면서 익숙한 벽돌 건물에 철골조의 가벼운 제스처를 부분적으로 결합해 변화의 뉘앙스를 담고자 했다.

신사동 근생/주택 건물(2008)은 58평의 협소한 대지에 5층 규모를 놓으면서 일조와 사선 매스의 한계를 피하고자 매스와 계단 오르는 방향이 반대가 되며 그 사이로 작은 틈새가 생겨난다. 저층부의 매스와 외피 사이로 끼어든 일자 계단은 거리의 움직임을 2층까지 연장한다. 계단은 3층으로 오르면서 기능적인 코어 방식으로 바뀌고, 4~5층에 이르면 흐름이 주택 내부로 연장된다. 하나로 이어지는 수직 동선이지만 각층 공간과 만나는 방식의 차이가 뚜렷하다. 계단은 정현아의 건축을 이해하는 중요한 미학적 수단이기도 하다. 실내를 휘돌아가는 계단은 그 자체로 공간을 만든다. 움직이든, 잠시 머물든 공간은 왠지 익숙하다. 계단은 길의 연장이다.

양쪽 다세대 주택과 차별화된 건물의 폐쇄적 성격은 외피에 조화(texture)를 부여했다. 위아래 2개층을 합해 29평밖에 되지 않는 주택은 매스를 드러낸 중정을 입체적으로 감싸면서 구성된다. 건물의 외피는 내부 공간의 성격을 밖으로 드러내는 방식보다는 외부에서는 통일된 하나로 읽히도록 했다.

도시의 주택은 임대 면적 최대, 시장의 불확정성, 주거의 프라이버시 문제 등을 안고 있다. 딱딱한 이중 외피의 설정, 층마다 약간씩 다르게 가져간 동선과 임대 공간이 만나는 방식, 건물의 최상층에 놓인 중정 등은 도시 주택이 가진 가능성과 한계의 총합이다.

주택은 사용자의 성격이 잘 드러나야 한다. 건축가의 특색이 많이 드러나는 집이 과연 좋은가에 의문이 있었다. 재료나 짓는 방식, 외관보다도 공간 체계(구성이나 배치)만으로도 충분히 건축가의 색깔을 드러낼 수 있다고 본다. 평면도만 펼쳐도 유형, 변주(variation)가 다르다. 거실과 침실이 붙는 방식도 수십 가지다. 재료, 공법, 에너지 효율 등 프로그램을 세밀하게 다루다 보면 자연히 바깥으로 형태가 드러나는 방식을 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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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동 근린생활시설(리모델링) / 사진=신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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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곡동 근린생활시설(리모델링)은 면하고 있는 30m, 25m 교차로를 고려하면 크지 않은 대지다. 미관지구 3m 후퇴선과 건폐율 50%를 고려하니 신축 건물을 기존보다 확연하게 크게 짓기 어려웠다. 신축보다는 기존 건물을 리모델링하기로 했다.

대지는 삼각형 모양이다. 부채꼴 평면의 기존 건물은 세 개의 원통형 매스에 벽돌타일 마감으로 가로 방향 오프닝이 과도하게 길었다. 기존 건물과 새로 짓는 부분 간 차이를 드러낼 수 있는 철골 캔틸레버 구조를 적용했다.

설계의 기본 방향은 기존 건물에 철골 캔틸레버 프레임을 덧대어 유리와 메탈의 가벼운 스킨으로 구성하기로 정했다. 당기면 늘어지는 메탈 시트(metal sheet)의 입체감 있는 패턴 사이로 바라보는 각도와 방향에 따라 투시율의 차이가 만들어진다. 층을 2개 라인으로 분절해 입면에서 층의 구분을 무너뜨린다.

대로변의 입지상 1층 저층부는 외피를 유리로 마감했고, 세컨 스킨이 덧붙은 몸통 부분은 임대 공간인 사무실 영역이다. 건물 위로 돌출된 최상층 옥탑 공간은 한 층 높이로 감싸는 수직 루버(차양)를 뒀다.

정현아 건축가는 2010년대 중반까지 도시적 조건과 건축적 구축 사이의 균형에 초점을 맞춘 '상황으로서의 구축'을 선보인다. 강남의 도곡, 논현, 역삼이라는 특수한 도시적 컨텍스트에 놓인 작업은 빠르고 가벼운 구축의 실험이었다.

스스로를 선배와 후배 사이에 낀 세대라고 말한다. 학생운동 부류와 해외여행을 즐기는 부류로 나뉜 80년대 후반 학번이다. 한국적 모더니즘을 어떻게 담론화해야 하느냐는 고민은 늘 하고 있으나, 거대 주제나 담론이 사그러지는 환경에서 건축가로 생존하기가 만만치 않았다. 지금 어떠해야 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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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인권기념관 조감도 / 사진 제공=디아건축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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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민주인권기념관(예정) 설계 공모에 당선됐다. 당선작은 '역사를 마주하는 낮은 시선'이라는 개념 아래 기존 건축물과 부지의 역사성을 살리기 위해 별개의 건물 신축과 함께 주요 전시 시설을 지하에 조성하는 안을 선보였다.

기념관 예정지,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1974)은 '국민 건축가'로 불리는 김수근이 설계했다. 고문실로 사용된 5층의 창문들은 극단적으로 좁게 설계됐고, 복도를 따라 마주보는 방의 출입문들이 서로 어긋나게 열리도록 돼 있다. 방에는 욕조를 설치해 물고문 수단으로 사용됐다. 계단은 나선형으로 설계해 피감자가 몇 층인지 혼동을 주는 효과를 줬다. 용도를 충분히 인지한 설계였다. 건축가는 야만의 역사를 돌이키는 게 괴로웠다.

정현아 건축은 도시 안의 작은 공간을 변화시키면서 전체 도시의 이미지와 기능을 바꿔나가는 '마이크로 어버니즘(micro urbanism)'을 추구한다.

[프리랜서 효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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