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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3 (목)

[씨티은행 철수] 관치 한국서 못 버티는 외국계… 말뿐인 ‘금융허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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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씨티은행이 출범 17년 만에 한국 소매금융 시장에서 철수하기로 했다. HSBC 이후 8년 만이지만, 외국계 은행의 ‘탈(脫) 한국’ 추세는 부정할 수 없는 흐름이다. 수년째 정치권과 정부에서는 ‘동북아 금융허브’를 외쳤으나, 결국엔 ‘엑소더스’(대탈출)만 자초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외국계 은행은 배당 간섭과 각종 금융 지원 차출 등과 같은 한국 특유의 관치금융 문화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해외 본사로 배당을 할 경우에는 국부 유출 논란도 불거졌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도 악재로 작용했다.

16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씨티은행의 본사인 씨티그룹은 전날 한국에서의 소매금융 사업을 접겠다고 밝혔다. 그간 철수설은 여러 차례 나돌았지만, 부인하지 않고 본사 차원에서 공식화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씨티그룹은 부진한 사업을 정리해 수익성을 끌어올리고자 한국을 포함한 13개 국가를 대상으로 이러한 결정을 내렸다. 다만 기업금융은 이어갈 방침이다. 지난해 말 기준 한국씨티은행의 임직원 수와 점포 수는 각각 3500명과 43곳이다. 이 중 철수 계획을 밝힌 소매금융 분야는 939명과 36곳이다.

조선비즈

스티브 롱 당시 씨티그룹 아시아태평양 기업투자 금융 부문 CEO(왼쪽에서 세 번째)가 2004년 2월 23일 오전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에서 한미은행과 공동으로 개최한 기자회견에서 당시 한미은행 하영구 행장(왼쪽에서 네 번째)과 악수하고 있다. 그해 한미은행은 씨티은행 서울지점과 통합해 ‘씨티은행’으로 출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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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년 전 HSBC와 비슷한 ‘소매금융’ 철수

이번 사태는 2013년 HSBC의 국내 소매금융 시장 철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영국계 대형 은행인 HSBC는 2011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강도 높은 구조조정 필요성이 제기되면서, 한국 철수 결정을 내렸다. 당시 한국 외에도 일본·태국·러시아 등지에서 기업금융을 제외하고 소매금융을 접었다.

발표 이후 HSBC는 신용대출과 같은 개인금융 관련 신규 업무를 서서히 중단하기 시작했다. 내부 직원들을 상대로는 근속연수 등에 따라 개인별로 달리 산정되는 위로금을 지급하면서 대규모 명예퇴직을 실시했다. 철수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11개 정도 남겨져 있던 지점 폐쇄 역시 당국의 인허가 문제로 쉽게 이뤄지지 않았고, 230명에 이르는 소매금융부 직원들의 거취 문제도 복잡했다.

씨티그룹이 HSBC와 같이 한국 사업 철수 결정을 내린 배경에는 우선 수익성 악화가 영향을 미쳤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한국씨티은행의 지난해 수익은 1878억원으로, 1년 전보다 3분의 1가량 줄어들었다. 특히 개인·소매금융 부문 당기순이익은 ▲2018년 721억원 ▲2019년 365억원 ▲2020년 148억원으로 매년 급격하게 쪼그라들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한국씨티은행의 소매금융 자산은 시중은행 전체 소매금융 자산의 2.7%에 불과하다"며 "더욱이 기업금융만큼 한 건당 많은 자산을 취급할 수도 없고, 인건비 등 비용은 비용대로 많이 드는 구조여서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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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철수 이전인 2007년 당시 HSBC 한 지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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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치금융’이 외국계 이탈 불러…말뿐인 ‘금융허브’

외국계 금융사의 국내 이탈은 수년째 잇따르는 모습이다. 외국계 금융사의 국내 진입과 국내 금융사의 해외 진출 실적을 합해서 구한 ‘국내외 금융사 진·출입 실적’을 보면 ▲2015년 48개 ▲2017년 37개 ▲2019년 24개로 오히려 갈수록 감소세를 보였다. 외국계 금융사의 국내 점포 수도 2016년 168곳으로 정점을 찍은 이후 ▲2017년 165곳 ▲2018년 163곳 ▲2019년 163곳 등으로 점차 축소되고 있다.

은행권에서는 수익성 이외에도 외국계 은행이 유독 한국에서 살아남기 어려운 특수성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차보전 대출, 원금·이자 유예, 재난지원금 지급 등 잦은 관치 동원 문화가 코로나 사태를 계기로 최근 더 심화했다"며 "외국계 은행은 국내 금융사보다 비교적 이런 방침에 비협조적인 편이었으나, 금융당국의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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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씨티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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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의 배당 문제도 오래전부터 골칫거리였다. 한국씨티은행은 매년 순이익의 대부분을 미국에 있는 씨티그룹 본사로 배당 형태로 보내는데, 이 때문에 ‘국부 유출’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덧씌워졌다.

단순한 눈치 보기에서 나아가 감독당국으로부터 배당 문제를 지적받기도 했다. 금융감독원은 2019년 3~5월 씨티은행에 대한 부문검사 결과, 배당 규모 내용과 관련해 ‘리스크 관리 위원회 운영 미흡’으로 지난해 7월 ‘경영유의’를 통보한 바 있다. 한국씨티은행은 올해 1월 20일 지적 받은 사항을 시정해 금감원에 보고했다.

더욱이 올해는 금융당국이 국내 금융지주를 대상으로 코로나를 이유로 직접 배당 성향을 20%로 제한한 상황이어서 부담은 가중됐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한국씨티은행은 권고에 딱 맞춰 배당 성향을 20% 정했다.

그럼에도 정부와 정치권은 한국을 ‘동북아 금융허브’로 만들겠다는 목표를 수십 년째 반복하고 있다. 이번 4·7 보궐선거 과정에서도 서울·부산이 대상이었던 만큼, 정치권에서는 어김없이 금융 중심지와 관련한 언급이 난무했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는 한국노총 산하 최대 산별인 금융노조와 정책 협약을 맺고 서울시 글로벌 금융허브 육성 추진 등을 약속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도 "부산이 아시아의 미래 금융도시로 도약할 수 있게 발판을 마련하겠다"며 "부산경제금융특구 지정 특별법을 추진하겠다"고 밝히기도 했다.

금융당국 등 정부에서도 금융허브 육성 목표를 십수 년째 논의하고 있으나, 실속 없다는 평가가 나온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42차 금융중심지 추진위원회 회의를 열고 2020~2022년까지의 ‘5차 금융중심지 조성과 발전에 관한 기본 계획안’을 세운 바 있다.

금융권 관계자는 "이런 논의가 처음 추진된 것이 고(故) 노무현 정부 때인 2003년인데, 그로부터 18년이 지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성과는 초라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라고 평가했다.

박소정 기자(soj@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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