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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5 (일)

이슈 미술의 세계

'한국에서의 학살’ 전시는 우리사회 문화성숙도 가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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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한국에서의 학살, 1951, 합판에 유화ⓒ 2021 - Succession Pablo Picasso - SACK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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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체파 거장 피카소가 그린 ‘한국에서의 학살(Massacre en Corée, 이하 MeC)’이 작품 무대인 한국에 온다.

1951년 5월 프랑스 살롱 드 마이(Salon de Mai)에서 발표된 지 70년 만이다.

5월1일부터 8월29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를 지켜보는 감회가 남다른 사람이 있다. 서양미술사학자 정영목 서울미대 명예교수다.

한국전쟁과 관련한 피카소의 창작 배경 연구에 심취한 그는 미국 일리노이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미술인이자 산악인이기도 한 그는 서울 상암동에 위치한 ‘산악문화체험센터’ 장도 겸하고 있다.


“신천학살은 MeC 작품 구상이후 벌어진 사건”


“원래는 MeC을 주제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려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유학했던 1980년대 초반 미국의 미술사 교수들이 그러하듯, 자칫 정치적 논란에 휘말릴 수 있다는 지도교수님의 조언으로 주제를 막스 벡크만(Max Beckmann) 연구로 바꿨지요.” 귀국후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고 ‘피카소와 한국전쟁’ 등 여러 편의 관련 논문을 썼다. 이 작품을 그린 피카소의 창작의도를 규명하기 위해서였다.

내로라 하는 피카소 전문가들이 있지만, MeC 연구는 정교수가 ‘지존’이다.

“피카소가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 말에 일어났다고 알려진 신천학살을 묘사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동안 이 작품이 반공법 위반으로 국내 전시가 불허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 해석은 일단 물리적으로 성립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MeC이 완성된 것이 1951년 1월이었으니까요. 폭 2m의 대작인 만큼 드로잉을 포함해 최소 2~3개월은 걸렸다고 봐야 합니다. 작품 구상은 신천학살이 벌어지기 전, 6.25전쟁 발발 직후에 이뤄진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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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상암동 산악문화체험센터 집무실에서 자신의 피카소 연구에 대해 설명하는 정영목 서울미대 명예교수.


신천학살은 6.25전쟁이 터진 해인 1950년 10월부터 12월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황해도 신천리에서 3만5000여명의 양민이 학살된 사건이다.

북한은 당시 미군 중위 해리슨이 주도한 만행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조사결과 신천에 진주한 미군 장교 중 해리슨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북한의 주장과 달리 실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아직도 미궁입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습니다. 황석영 작가의 소설 ‘손님’에 묘사된 대로 사건 관련자들마저도 시각이 상반됩니다. 북한이 신천학살을 국제사회에서 주장하기 시작한 것은 피카소의 MeC 발표 다음 해인 1952년입니다.”

정 교수의 결론은 명확하다.

MeC은 특정 국가나 군대 등을 구체적으로 상정한 그림이 아니라는 것.

“작품의도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것은 첫째 시대정신입니다. 피카소와 같이 1880년대 초반 태어난 유럽의 작가들 프란츠 마르크, 에른스트 루트비히 키르히너, 막스 벡크만, 오스카 코코슈카, 또는 이태리 미래파의 마리네티 등 그들은 청년기인 1914년 발발한 1차 대전을 겪습니다. 낭만적 이상주의에서 참전했지만 전쟁의 참혹함만 뼈저리게 체험합니다. 많은 참전 작가가 죽거나 정신병을 앓게 됩니다.”

마르크와 마리네티는 1차 대전에서 전사했고, 코코슈카는 중상을 입고, 키르히너와 벡크만은 정신적 장애에 빠지게 된다.

“중년에 접어든 이들 세대는 또다시 2차 대전을 겪게 되죠. 체험을 통해 피카소 세대 작가들은 전쟁에 대해 진저리쳐지는 공포와 혐오를 갖습니다. 피카소가 MeC을 포함해 ‘게르니카’와 ‘시체구덩이’등 반전 3부작을 통해 규탄하려 한 것은 ‘전쟁과 폭력’ 그 자체일 겁니다. 작품 구상 무렵인 1950년 7월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했습니다. 미국과 소련 간의 핵전쟁으로 인류가 멸망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극에 달했습니다. 그때의 반전 시대정신을 형상화한 것으로 봐야합니다. 이와 같은 심정의 예를 하나 더 들어보죠. 1950년 6월 26일 뉴욕에 거주하던 벡크만은 자신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그래, 원자(atom)는 악마의 물건이야. 오늘 또다시 한국에서의 위기 소문이 도는데, 그래 좀 지켜보자.”


학살 장면은 고야, 마네 등도 채택한 전형적 반폭력 구도


만약 전쟁 자체를 반대하려는 의도였다면 왜 하필 ‘학살’이라는 구도를 설정했을까?

“신천학살 논란이 국제적으로 제기된 시점은 작품이 빛을 본지 1년이나 지난 뒤였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해를 받는 이유가 신천학살을 연상시키는 구도 때문입니다. MeC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중요한 모티브가 있습니다. 총을 가진 권력자들이 비무장 민간인을 향해 총구를 겨누는 장면은 유럽 화가들이 대를 이어 답습해온 전형적, 고전적 구도입니다. 고야의 ‘1808년 5월3일’, 마네의 ‘바리케이드’, ‘막시밀리앙의 처형’같은 작품의 구도가 그렇습니다. 피카소가 1955년에 남긴 스케치 ‘파리코뮌의 처형’도 같은 구도입니다. 사실 피카소가 이런 진부한(?) 도식을 따른 것이 평단의 혹평을 초래합니다. MeC의 완성도가 전작 ‘게르니카’에 비해 현저히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게 된 거죠.”

하지만 일단 형성된 선입견이 걷혀지기는 쉽지 않다.

게다가 피카소는 1944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한 공산주의자였다.

그래서 공산진영과 자유진영의 싸움이었던 6.25 전쟁에서 미군을 살인마로 그리려 했다는 해석이 고개를 들었다.

“이 작품을 이해하기 위한 세 번째 포인트가 피카소의 개인사입니다. 피카소가 성장할 당시 고국 스페인은 러시아의 영향을 받은 아나키즘이 만연해 있었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대부분 레지스탕스 출신 좌파 지식인들이기도 했구요. 공산당 입당은 이념적 선택이 아니라 당시 시대 분위기와 사회사조에 동화됐던 것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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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그린 조지프 스탈린 초상화가 실린 1953년 12월19일자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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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생전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과 사이가 아주 좋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재밌는 일화가 있습니다. 스탈린 사망직후 공산당에서 피카소를 초청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피카소는 자신만의 화풍으로 스탈린을 그린 것인데 공산주의자들에게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보였습니다. 공산당 간부들은 “수염 난 여자 같다”며 피카소에게 화를 냈고 피카소는 “나만의 모나리자를 그린 건데 알아보지 못한다”며 화를 냈습니다. 스탈린의 끔찍한 학살 만행을 보아온데다가 그 일이 생기면서 피카소는 공산당과 멀어지게 됐다고 합니다.”

정 교수의 해석에 따르면 MeC에는 유명한 피카소의 여성 편력도 일부 반영돼 있다고 한다.

“MeC을 그릴 무렵 70세의 피카소는 20대 초반의 아름다운 여류화가 프랑소와즈 질로와 사랑에 빠져 아들 클로드와 딸 팔로마를 낳았습니다. 인생 후반부, 잉태와 출산의 감격을 맛 본 피카소는 작품 속에서 그것을 표현합니다. 총구 앞에 서 있는 임신한 여인과 나체의 여인은 그의 작품 속에서 처음 묘사되는 대상입니다. 그의 작품 연대기를 ‘레드 피리어드’ ‘블루 피리어드’ 등으로 구분할 수 있는 것도 일정 시기마다 개인적 체험이나 감상을 그대로 작품에 옮겼기 때문이죠.”


공산당도 “미군임을 명시하지 않았다”며 격렬 비난


피카소는 MeC을 발표한 뒤에 프랑스 공산당으로부터 격렬한 비난을 받았다.

총구를 겨누는 병사들이 미군임을 명시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에 입각한 노골적 찬양 미화 그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피카소는 MeC뿐 아니라 많은 작품에 대해 “퇴폐적 부르조아 예술”이라는 지탄을 받았다.

미국 정부도 피카소를 비난했다.

공산주의자인 그가 십중팔구 미군을 악마화하려는 의도로 그렸으리라는 막연한 추정 때문이었다.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렸던 1950년대 초반의 미국은 그랬다.

피카소는 미국 방문 비자를 신청했으나 두 번이나 거부당했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그를 요주의 감시 대상으로 분류한 탓이었다.

그는 신대륙 미국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같은 시대에 세계적 명성을 얻은 예술가 중에서 유일했다.

피카소 자신도 MeC이 오해받는 것을 안타까워하면서 이렇게 해명했다.

“전쟁이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라는 질문에 떠오르는 것은 괴물 밖에 없다. 미군이나 특정국가 군대의 헬멧이나 유니폼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미국 뿐 아니라 모든 인류의 편이다.”

적어도 당시에는 피카소의 고백이 먹혀들지 않았다.

“어찌 보면 희극이고 어찌 보면 비극이죠. 신천학살이 미군 소행이라는 건 북한 측 주장입니다. 우리는 거기 찬성하고 동조할 하등의 이유가 없어요. 하지만 우리나라는 그때나 지금이나 미국의 입김에 크게 좌우됩니다. 매카시즘에 빠져있던 미국 정부가 피카소를 요주의 인물로 간주하자 그 영향을 받게 된 겁니다. 심지어 피카소라는 상표의 크레파스 판매를 금지할 정도였습니다. 결과적으로 북한의 선전 선동에 부화뇌동해 덩달아 피카소를 미워하는 자가당착에 빠진 겁니다.”

피카소의 MeC과 그 후속타로 “전쟁‘과 ’평화‘가 발표된 이듬해인 1953년 부산 피난시절의 해프닝이다.

당시 김병기 화백은 몇 명의 미술인들이 모인 자리에서 ‘피카소와의 결별’이라는 선언문을 낭독한다.

부산 광복동 어느 다방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읽어내려 간 선언문 골자는 아래와 같다. 정교수의 논문 ‘피카소와 한국전쟁’ 에는 상세하게 인용돼 있다.

“존경하는 파블로 피카소씨, 당신은 최근 한국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사태에 대하여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중략-

피카소 씨여! 당신이 발표하신 ‘조선의 학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총을 겨누는 로보트 병사들의 한 구룹과 총을 맞는 벌거숭이 부녀자들의 다른 한 구룹이 무엇을 또한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번 동란의 격랑 속에서 한국에서의 학살은 당신의 ‘조선의 학살’과는 정반대의 학살이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당신의 평화는 대체 어떤 평화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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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명예교수가 산악문화체험센터 내 인공암벽을 배경으로 포즈를 취했다. 그는 세계의 험준한 산들을 등정한 프로급 클라이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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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 쓰듯 작성한 선언문을 김병기 화백은 이를 프랑스의 피카소 자택으로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고 한다.

피카소의 MeC 창작 의도에 대해 미술인들 사이에서 다른 해석이 제기됐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이 후에 제기된 평가를 보더라도 미술계에서 MeC을 보는 관점이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


MeC 전시 자체가 진일보, 문화 성숙도 가늠할 시금석


전후 파리에 체류하던 김환기 화백의 부인인 김향안씨가 피난시절 미술인들과 사뭇 다른 평가를 내놨기 때문이다.

그는 MeC을 그린 피카소에 대해 “인류의 평화를 사랑하는 인간인 것이 그의 위대성이며, 그것이 곧 정직하게 그의 예술에 반영됨으로써 그의 그림이 항상 감상자에게 절실하게 와 닿았다”고 토로했다.

“우리나라 고속철도에 떼제베(TGV)를 들여오기 위해 프랑스 정부와 논의할 무렵, 미테랑 당시 대통령의 방한 선물로 외규장각 도서와 함께, MeC도 대상에 포함시키자고 돌아가신 임영방 국립현대미술관장님께 제안한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MeC을 둘러싼 부정적 고정관념과 반공법 논란 등 여러 장애요인이 있었겠죠.”

정 교수의 결론은 이렇게 요약될 수 있다.

MeC의 제작, 발표시점을 고려해볼 때 이 작품은 한국전쟁 자체를 형상화한 것이다.

‘신천학살’만을 기록, 표현했다기 보다는 학살로 상징되는 전쟁의 피해자와 가해자를 도상학적인 전통 구도에 담아냈다.

이를 뒷받침 하듯, 피카소 자신도 특정 국가나 군대를 묘사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다.

MeC은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전쟁과 학살을 진저리 날 만큼 혐오하던 시대분위기의 반영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는 관점이다.

“MeC은 2021년의 우리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거울이라고 봅니다.

작품이 발표되고 70년 만에 한국에 왔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미 1953년 동경국제미술전에 초대되어 남관 화백이 이 작품을 보고 대담한 글이 있습니다.

전시가 가능해졌다는 것부터 우리 정부와 시민의식이 한 걸음 전진한 것입니다.

적어도 법적으로는 이 작품을 냉전의 올가미에서 해방시켰으니까요.

남은 것은 우리의 편견을 벗는 일입니다. 피카소가 작품을 통해 표현하고자 했던 반전 의지를 있는 그대로 온전히 받아들여야 합니다.

MeC은 일종의 시금석입니다.

이번 피카소 전시회는 우리가 고질적이고 퇴행적인 진영논리를 벗어날 수 있느냐를 가늠하게 될 겁니다. 예술을 예술로 볼 수 있느냐라는 문화적 성숙도의 잣대가 될 겁니다.”

[글/사진 이창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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