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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이슈 미술의 세계

그릇도 사람도 모두 크네…도자로 만든 거인의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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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서울 원서동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열리고 있는 이헌정 개인전 전시 전경. [사진 제공 =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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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의 세계에 들어간 기분이었다. 흙으로 빚어 가마에서 구운 식탁과 접시, 컵, 주전자가 시중 제품보다 1.5배 컸다. 그 앞에는 높이 2.6m에 달하는 도자기 인간이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어깨에는 쪼그라진 날개가 붙어 있고, 가슴 주변에는 총알이 뚫고 지나간 듯 작은 구멍들이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내린 붉은색 유약은 피처럼 느껴진다.

서울 종로구 원서동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만난 이헌정 작가(54·사진)는 "어딘가 미완성된 것 같은 거인은 내 자화상"이라며 "아직도 도예를 맴도는 내 여행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의 대형 도자 작품들은 작은 전시장을 더 좁아 보이게 만든다. 흙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작품 크기를 키운 것 같기도 하다. 일단 규모부터 관람객을 압도하고 표현의 영역에 놀라게 한다. 식탁과 그릇 세트 작품 '디너 파티'뿐만 아니라 거인 조각 '브레이브 맨', 가구와 벽으로 이뤄진 '도예가의 방 혹은 건축가의 그릇'까지 모두 도자기다. 작가는 "젊었을 때는 흙을 지배하고 통제하려고 했는데, 요즘은 흙을 받아들인다"며 "내가 아니라 흙이 주체가 되는 느낌이 강해진다. 균형의 중심이 흙으로 가고 내가 재료에 녹아드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흙을 의인화시킨 '흙의 일상'을 개인전 주제로 정했다. 흙과 불로 이룰 수 있는 현대미술의 가능성을 확장하는 작품들을 펼쳤다. 깨지기 쉬운 도자로 거인을 만들고 방바닥과 천장, 조명까지 무한 변주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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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도자로 만든 '도예가의 방 혹은 건축가의 그릇' 안에 직접 들어가 볼 수 있다. 도예와 건축, 조각 영역을 하나의 작품으로 아우르는 설치 작품이다. 외형은 그저 반듯한 나무 상자이지만, 그 안은 다채로운 유약이 흘러내린 별세계다. 작가의 상상력과 실험정신, 작업 내력을 동시에 드러내는 공간이기도 하다. 그는 홍익대 미대와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하고 미국 샌프란시스코 아트 인스티튜트 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한 후 가천대에서 건축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작은 찻잔에 담긴 물을 보면서 무한 우주를 느낀 적이 있어요. 다도(茶道)를 정신적 제의로 여기는 이유이기도 하죠. 그리고 건축가가 만든 공간이 인간의 행태를 담는 그릇이라고 생각하기도 해요. 건축가의 방과 도예가의 그릇을 바꾸면 어떨까 해서 '도예가의 방 혹은 건축가의 그릇'을 제작했죠."

전시장 입구에 있는 도자 조각 '비너스'는 구석기 시대 유물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에 영감을 받아 만든 작품이다. 실제 10㎝ 정도에 불과한 '빌렌도르프의 비너스'는 주술 도구 혹은 숭배 대상으로 추정된다. 역사적인 조각상을 크게 확대하고 등받이가 높은 콘크리트 의자에 앉힌 이유는 뭘까. 표면에는 형광 붉은색 차량용 페인트를 칠해 현대적인 모습으로 재탄생시켰다.

"인류 최초의 인물 조각상인 '빌렌도르프의 비너스'가 작지만 매력적이어서 제 방식대로 변형시켰어요. 예전 의자 작품과 잘 어울려서 그 위에 올려놨고요. 저는 아이들이 장난하듯이 즉흥적으로 작품을 만들어요. 농담하듯이 유약 대신 페인트를 칠해보고요."

그는 2005년 서울 청계천에 길이 192m 도자 벽화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를 설치하고 개인전 40여 회를 이어왔다. 전시는 8월 22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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