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철수와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점령 이후 미국의 동맹국들 사이에서 ‘자강론’이 커지고 있다. 조 바이든 미국 정부의 국익 우선 전략이 드러난 만큼 안보를 위해 미국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는 판단에서다. 유럽에서는 독자 방위력을 키워 ‘전략적 자율성’을 확보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고, 차이잉원(蔡英文) 대만 총통은 “스스로를 더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유럽, 전략적 유연성 목소리
전략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기류는 18일(현지시간) 영국 하원에서 열린 아프간 사태 관련 비상회의에서 확인됐다. 다수의 의원들이 아프간 방어를 위한 영국의 개별적인 노력이 없었던 문제를 지적했다. 테레사 메이 전 총리는 영국이 미국 철수 후 아프간 정부를 계속 지원하기 위해 다른 동맹국들을 모으지 않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걱정된다”며 “영국 외교정책에서 주요 실패 사례”라 지적했다. 토비아스 엘우드 국방위원장도 “영국이 아프간을 떠나선 안 됐다”고 비판했다.
아프간 참전 용사인 톰 투겐트하트 하원 외무특별위원장은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한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새 비전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는 “우리는 향후 하나의 동맹국이나 한 명의 리더가 내리는 결정에 의지하지 않고, 유럽의 나토 동맹국들에 다시 힘을 불어넣는 비전을 세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앞서 유럽연합(EU)의 전략적 자율성을 요구해온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주장과도 유사한 것이다.
영국의 분위기는 EU 차원으로도 확대될 조짐이다. 나탈리 루아조 EU 의회 국방소위 위원장은 이날 미국 싱크탱크 애틀랜틱카운슬에 기고한 글에서 “새 미국 지도부가 국제 문제에 더 많이 관여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라며 “유럽이 전략적 자율성을 강화해 필요할 때 언제든지 자율적으로 행동하거나 동맹국과 협력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아프간 사태로 EU의 전략적 자율성 논의가 한 걸음 나갈 수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 앞서 EU는 1990년대 중반 발칸지역 안보 위기를 겪은 뒤 나토에 대한 의존을 줄일 필요성을 느꼈으며, 꾸준히 자체적인 방위 능력을 강화했다. 최근에는 러시아의 위협이 커지면서 방위력 증강의 필요성이 더 커졌다. 하지만 아직 수송이나 정보·감시능력 등이 부족해 미국 없이 독자적으로 작전을 수행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U의 전략적 자율성 확보에는 미국의 외교 노선도 주요 변수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가 일방주의적 노선을 보이고 방위비 압박을 강화하자 전략적 자율성을 요구하는 프랑스의 목소리가 커졌다. 조 바이든 정부는 나토의 결속을 강조하며 유럽의 환영을 받았으나, 이번 아프간 사태로 EU의 불안감은 다시 커졌다. 데이브 키팅 애틀랜틱카운슬 유럽센터 선임연구원은 “갑작스러운 아프간 철수로 동맹을 보호하겠다는 미국의 약속과 나토의 진정성에 의문이 나오고 있다”라며 “이는 EU의 독자 방어 능력에 대한 논의를 가속화할 것”이라 말했다.
다만 유럽의 독자 방어론이 현실화되기까진 난관이 많다. 나토 체제에서는 미국과 영국 등 비EU 국가에 방위비를 의존할 수 있었으나, 자체적인 방어 능력을 강화하려면 EU의 재정 부담이 늘어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대다수 EU 국가들이 국방비로 국내총생산(GDP)의 2%도 지출하지 않는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이날 의회에서 “영국이 미국 없이 별도의 연합을 결성해 작전을 실행하는 것은 환상에 가깝다”고 말했다.
■대만, “스스로 더 강해지고 더 단결해야”
아프간 사태 이후 대만 안팎에서 ‘대만이 제2의 아프간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자 차이 총통이 직접 입장을 표명하며 민심 수습에 나섰다.
차이 총통은 18일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최근 아프간 정세 변화가 대만에서도 많은 토론을 불러일으켰다”며 “대만의 유일한 선택지는 스스로를 더 강하게 만들고 더 단결하며 자신을 보호하겠다는 결심을 더 확고히하는 것”이라는 입장을 밝혔다. 그러면서 “스스로 적극적인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보호에만 의존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지가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무기력하고 미국에만 의존했던 아프간 정부와 대만은 다르다는 것이다. 차이 총통은 또 “우리는 우리의 존재를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한다”며 “그것은 민주주의와 자유의 가치를 견지하고 국제사회의 집단 안보와 번영을 위해 대만이 필수불가결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밝혔다.
차이 총통은 스스로 힘을 키우고 대만의 전략적 가치를 높여 중국의 위협에 맞서겠다는 의지를 강조했다. 이같은 입장 표명은 미군 철수 결정으로 아프간이 이슬람 무장세력 탈레반에 점령된 이후 미국에 안보를 의존하고 있는 대만이 제2의 아프간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안팎에서 제기된 가운데 나왔다.
중국 관영매체는 대만이 미국에 의지해 중국에 맞서다가는 언제 아프간처럼 될 지 모른다는 협박성 경고로 연일 대만 민심을 흔들고 있다. 관영 환구시보는 19일 사설에서 “설리번 보좌관과 차이 총통의 발언은 미국이 지원하는 아프간 정부의 급속한 붕괴가 대만에 진정한 충격을 줬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대만도 아프간과 다를 것이 없다”며 “대만 정권을 유지하는 비용이 이익보다 크면 미국은 대만을 버릴 것”이라고 했다.
야당인 대만 국민당 쪽에서도 유사한 주장을 했다. 국민당 소속인 자오사오캉(趙少康) BCC 라디오 방송국 사장은 “아프간의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며 “미국에만 기대면 아무 일도 없을 것으로 봐서는 안된다”고 논란에 불을 지폈다. 국민당의 장야중(張亞中) 쑨원학교 교장도 “미국은 대만해협에서 군사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군대를 파견한다는 약속 없이 무기만 판매하고 있다”면서 “미국은 자국 이익에 따라 언제든 대만을 포기할 수 있기 때문에 대만은 양안(중국과 대만) 관계를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만 정부 쪽은 이에 맞서 “대만은 아프간과 다르다”며 민심의 동요를 막으려는 모습이다. 쑤전창(蘇貞昌) 대만 행정원장은 지난 17일 기자회견에서 “아프간 정세가 어지러운 것은 내부 정세가 먼저 어지러웠기 때문”이라며 “내부 안정과 질서가 유지된다면 대만을 침략하려는 어떠한 무력에도 대항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아프간 사태는 자주국방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준다”며 “국가에 대한 신념을 강화하고 방어한다면 어느 누구도 대만을 침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논란과 우려가 이어지자 미국도 지원사격을 했다.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17일(현지시간) 언론브리핑에서 ‘대만·이스라엘이 미국이 자신들을 포기할지 모른다고 느끼는 데 대해 뭐라고 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동맹과 우방국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신성불가침”이라며 “대만과 이스라엘에 대한 우리의 헌신은 계속 강력하다고 믿는다”고 답했다.
베이징|이종섭 특파원 ·|박용하 기자 nomad@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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