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국가 희망 유화 메시지 발표…새 정부 구성 박차
경제 붕괴·인력 부족·IS 갈등·국제사회 인정 등 난제도 산적
서양 문화 세례로 과거와 달라진 국민 통치도 관건
카불 순찰 중인 탈레반 대원들[AFP=연합뉴스] |
(뉴델리=연합뉴스) 김영현 특파원 =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31일(현지시간) 미군 철수 마무리를 계기로 아프가니스탄의 실질적 통치 세력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2001년 미국 공습으로 정권을 잃은 탈레반으로선 20년 만에 외세 개입 없이 자력으로 영토 대부분을 운영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탈레반은 '완전 독립'을 주장하기도 했다.
탈레반은 우선 '제국의 무덤'에서 물러난 강대국 명단에 미국을 추가하면서 한껏 자존심을 세우게 됐다.
과거 원나라부터 무굴 제국, 영국, 소련까지 당대를 호령한 세계 초강대국이 아프간에서만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중앙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에 있지만, 국토의 절반이 해발 1천m 이상인 산악국인데다 혹독한 겨울 날씨, 산재한 토착 세력의 저항 등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정복하기 어려운 나라 가운데 한 곳이 아프간이었던 셈이다. 이번엔 미국이 철군 선언 후 쫓기듯 떠나는 치욕을 맛본 것이다.
세계 최강 미군을 상대로 기개는 드높였지만, 아프간을 통치할 탈레반의 앞날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국제사회가 '탈레반의 아프간'을 선뜻 인정해주지 않는 가운데 국내 여러 난제와 관련해서도 뾰족한 해결책을 찾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난 15일 수도 카불을 점령한 탈레반은 '정상 국가'를 희망하며 새 정부 구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권 보호, 개방적 정부 구성, 국제사회와 교류 희망 등 유화적 메시지도 쏟아냈다.
샤리아법(이슬람 율법)을 통치의 근간으로 삼되 여러 종족을 두루 아우른 포용적 정부를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23일 수도 카불에서 열린 탈레반의 대규모 지도자 회의 '로야 지르가' 모습. [SNS 캡처=연합뉴스. 재판매 및 DB 금지] |
하지만 탈레반의 희망이 무리없이 현실화할지에 대해서는 회의적 시각이 많다.
아랍권 매체 알 자지라는 최근 탈레반이 정권 안정을 이루려면, 이른 시일 안에 국민의 '공포'가 아니라 '인정'을 끌어내야 한다고 분석했다.
국민 상당수가 과거 탈레반 집권기(1996∼2001년) 때와 달리 서양 문화에 익숙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도시 시민 상당수는 은행 계좌를 갖고 있고, 스마트폰을 쓰고 인터넷을 이용하는 데 익숙하다.
탈레반의 통치기를 기억하지 못하거나 그 이후에 태어난 젊은 층도 많다.
탈레반이 과거처럼 샤리아 법을 앞세워 엄격하게 사회를 통제할 경우 이들로부터 상당한 반발을 살 것으로 보인다.
탈레반은 예전 통치 때 여성의 취업, 사회 활동, 외출 등을 제한했다. 음악, TV 등 오락이 금지됐고 도둑의 손을 자르거나 불륜을 저지른 여성을 돌로 쳐 죽게 하는 가혹한 벌도 허용됐다.
10만명도 안되는 탈레반 병사로 아프간 전국을 통치하는 것도 크나큰 과제다. 아프간의 인구는 약 4천만명이다.
전문가들은 "탈레반이 순식간에 전국을 점령했더라도, 주요 도시를 통치하는 것은 또 다른 과제다. 상당한 인력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탈레반 전사 대부분이 숫자조차 읽거나 쓸 수 없는 문맹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탈레반의 '인력난'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지도부의 사면령 발표에 이어 자비훌라 무자히드 탈레반 대변인이 지난 24일 "미국이 아프간 내 숙련된 기술자와 전문가들을 데려가고 있다"며 미국을 비판한 것도 것도 이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또 외부의 강력한 적이 사라진 상태에서 지도부가 강온 기류, 지역 등에 따라 여러 파벌로 나뉜 내부 상황을 잡음 없이 통제해 나갈 수 있느냐도 관심사다.
탈레반이 전국에 사법·보안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면 곳곳이 무법상태에 빠질 수 있다. 저항군의 활동도 점차 커질 수도 있다.
아프간 카불의 은행 앞에 줄 서 있는 시민. [AP=연합뉴스] |
무엇보다 최악으로 치닫는 현지 경제 상황이 탈레반에는 가장 큰 고민거리다.
탈레반이 아프간을 장악하자마자 물가는 폭등했고 실업자는 늘어나는 등 실물 경제는 바닥으로 가라앉는 분위기다.
아프간은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가운데 하나로, 정부 예산 중 미국 등의 지원이 차지하는 비율이 80%에 달한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아프간으로의 달러 송금 등을 금지했고, 미국 연방중앙은행 등에 예치된 90억달러에 달하는 아프간 중앙은행 외화 자산에 대한 탈레반의 접근도 차단됐다.
미군 철수 후 고개를 드는 또 다른 극단주의 세력 이슬람국가 호라산(IS-K)과의 갈등도 탈레반에는 큰 부담이다.
그간 탈레반과 대립 관계였던 IS-K는 최근 카불 공항 폭탄 테러를 주도하며 본격적인 반(反)탈레반 세력을 규합, 탈레반과 본격적인 주도권 경쟁에 나서는 양상이다.
탈레반으로서는 통치 체제 구축과 함께 내부의 적과도 싸워야 하는 힘겨운 상황을 만난 셈이다.
한편, 이와 함께 탈레반의 본색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시각도 여전하다.
지방 경찰청장 기관총 처형, 부르카(얼굴까지 검은 천으로 가리는 복장)를 쓰지 않고 외출한 여성 총살 등 과격한 행태가 전해지면서 비판과 공포가 섞인 반응이 나오고 있다.
아직 아프간을 빠져나가지 못한 서방 국가 협력 현지인에 대한 탈레반의 테러 가능성도 제기된다.
사면령에도 불구하고 탈레반이 이들을 색출하는 데 혈안이라는 보도도 이어지고 있어서다.
cool@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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