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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법 없이도 사는 법] ‘밟지도 때리지도 않았다’는 정인이 양모, 1심은 왜 살인을 인정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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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5일 서울고법에서는 양부모가 16개월 입양아를 학대해 죽음에 이르게 한 ‘정인이 사건’의 첫 2심 공판이 열렸습니다. 이날 재판부는 가해자인 양모 장모(35)씨에 대해 다음 재판기일에 그의 손·발 크기를 재는 검증을 하겠다고 밝혔습니다.

법원이 사건 현장을 찾거나, 동영상을 재생하는 방식의 검증은 흔히 이뤄집니다. 그런데 피고인의 손·발 크기를 재는 검증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법원은 왜 이런 검증을 택했을까요?

장씨는 살인·상습아동학대 등의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정인이의 직접 사인(死因)은 췌장 절단 및 장간막 파열로 600ml상당의 복강 내 출혈입니다. 검찰은 장씨가 키79㎝, 몸무게 9.5㎏의 정인 양의 배를 여러 번 밟아 사망하게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정인이에게는 우측 대퇴부, 뒷머리, 왼쪽 팔, 갈비뼈 세 곳의 골절도 있었습니다. 사망 이전 상습 아동학대의 흔적입니다.

하지만 장씨는 살인은 물론 학대 사실조차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췌장 파열에 대해서도 ‘실수로 아이를 떨어뜨렸다’ ‘심폐소생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했습니다.

상당수의 살인 사건에서 피고인들은 혐의를 부인합니다. 이 경우 ‘죽일 의도’를 판단하기 위해 재판부는 여러 간접증거를 참조합니다. 이 사건의 1심 재판부도 그런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 입양부터 사망까지, 무슨 일이 있었나

판결문에 따르면 장씨는 작년 1월 정인이를 입양한 직후부터 양육 스트레스를 호소했습니다. 3월 경 어린이집 담임 교사는 정인이 얼굴과 목에 상처와 멍을 발견하고 아동학대 신고를 합니다. 하지만 신고 이후에도 멍이 든 채 등원하는 일이 계속되다 작년 7월부터는 약 2개월간 등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9월 무렵 등원한 정인이 몸은 마른 상태에 배만 볼록하게 나와 있었고,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하루 종일 담임교사에게 안겨 있었습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는 정인이를 두고 양모 장씨는 남편에게 “3일까지 굶어도 안 죽는다”며 “쌍욕 나오고 패고 싶은데 참는다”고 했습니다.

사망 당일인 10월 13일 오전, 장씨 아랫층 주민은 “(윗층에서) 덤벨을 내려 놓는 듯한 진동이 4~5회에 걸쳐 반복적으로 지속돼 윗층을 방문했다”고 했습니다. 아이가 뛰는 층간소음과는 달랐다고 합니다. 이때 장씨가 “죄송해요, 제가 내일 말씀드릴게요”라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게 이 주민의 진술입니다. 이날 오전 정인이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 응급실에 도착했고 수차례 심폐소생술에도 불구하고 결국 저녁 6시40분경 사망했습니다.

◇ 법원이 ‘살인’ 인정한 근거는

재판부가 ‘배를 밟았다’는 검찰 공소사실을 인정한 핵심 근거는 부검 감정서 및 법의학자, 응급의학과 전문의의 진술입니다. 부검감정서에 따르면 정인이의 사인은 복부 손상이고, 췌장이 완전히 절단돼 있었습니다. 췌장 파열은 그 자체로 극심한 복통을 유발하고, 정상 보행이 불가능한 정도의 손상입니다. 법의학교수는 “췌장 손상은 어린이 외상의 0.3%로 매우 드물고, 교통사고 등에 의해 발생한 사례가 보고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는 “아동이 엎드린 상태에서 체중으로 강한 압력이 가해지는 등의 경우에 완전절단이 발생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검감정서를 본 법의학자는 “복부 표면에 멍 등이 관찰되지 않는 것은 피해자가 복부를 (맨발로) 밟혔다는 방증”이라고 했습니다. 피부로 피부를 접촉했기 때문에 타박상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그는 “한번의 밟음으로 장간막 파열과 췌장 절단이 동시에 일어나기 어렵다”며 “적어도 2회 이상 배가 밟혔을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정인이 몸에 발생한 여러 골절에 대해서도 재판부는 “장씨가 때려 발생한 것으로 보는 게 맞는다”고 했습니다. 이제 겨우 걷기 시작한 정도의 아기가 뒤로 넘어져 뒷머리 골절이 발생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갈비뼈 골절도 유아가 혼자 넘어지거나 소파에서 떨어져 발생하기는 어렵고, 그 위치도 뒤쪽이어서 가격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습니다.

◇ ‘인형 실험’ 까지 했던 1심, 장씨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만행”

재판부는 “아이를 흔들다가 떨어뜨렸다”는 장씨 주장을 검증하기 위해 시험 결과를 인용했습니다. 사망 당시 정인이 크기와 유사한 크기 86㎝, 무게 9.05㎏인형을 성인 여성의 겨드랑이 높이에서 떨어뜨리는 시험을 한 결과 모두 다리 부위가 먼저 닿았고 등 부위가 부딪치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 밖에도 심폐소생술 과정에서 장기가 손상됐을 가능성이나 첫째 아이가 소파에서 뛰어내리면서 복부를 밟았을 가능성도 모두 점검한 후 결국 ‘장씨가 배를 수차례 밟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처럼 성인인 장씨가 생후 16개월 아이의 배를 밟았고, 수차례 골절에도 병원에도 데려가지 않았으며 사망 당일 119 신고 직후에도 별로 동요하지 않은 점 등을 종합해 재판부는 ‘살인의 고의’를 인정했습니다. 아이가 사망할 가능성을 인식하면서 가해행위를 했고 이는 곧 살인의 ‘미필적 고의’라는 판단입니다.

거의 모든 ‘가능성’을 검토해 유죄를 인정한 재판부는 비로소 양모의 행위에 분노합니다. 양형 이유에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만행” “사망당시 신체 곳곳에 학대로 인한 골절 등 신체 손상의 처절한 흔적을 갖고 있었다” “가늠할 수 없는 극심한 정신적 고통과 공포심을 겪다가 피고인에 의해 마지막 생명의 불씨마저 꺼져갔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장씨는 2심에서도 정인이를 발로 밟은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심폐소생술 과정에서 장기가 파열됐을 가능성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면 심폐소생술 과정을 확인하기 위한 사실조회를 신청한 상태입니다. 2심 재판부가 장씨 손발 크기를 재 보겠다고 한 것은 그가 발로 정인이를 밟았다는 1심의 결론이 맞는지 다시 확인하기 위한 절차로 보입니다.

2심 재판부가 ‘발로 밟았다’는 결론을 바꿀까요? 검증 결과 장씨 발 크기가 유죄 심증에 확신을 더해 주는 셈이 된다면 장씨의 무죄 주장은 안하느니만 못한 결과로 돌아올 것 같습니다. 차곡차곡 ‘간접사실’을 쌓아 결론을 내린 1심 논증 과정을 볼 때 충분히 예상되는 결과입니다.

[양은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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