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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딱 두달만 살면 안될까요” 아파트로 번진 초단기 월세 ‘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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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차법 규제로 성행… 계약서 안쓰고 편법 거주

조선일보

서울의 한 아파트 상가 내 공인중개사무소 매물 게시판이 텅 비어있다. /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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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성북구 아파트에서 전세살이 하던 40대 김모씨는 최근 전세 계약이 끝나는 내년 1월부터 5월까지 4개월만 더 사는 조건으로 집주인에게 넉 달 치 월세 400만원을 내기로 했다. 몇 달 전 집주인이 “실거주할 거라 전세 연장이 안 된다”고 통보했고, 김씨는 급하게 경기도 고양의 아파트를 샀는데 새 아파트는 5월 말에나 입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집주인한테 ‘이사 때까지만 사정을 봐달라’고 했는데 ‘전세 계약이 갱신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며 딱 잘라 거절하더라”며 “주소를 옮기고, 따로 계약서를 쓰지 않는 조건으로 집주인과 합의했다”고 말했다.

최근 수도권 아파트 임대차 시장에서 초단기 월세, 이른바 ‘깔세’가 확산하고 있다. 흔히 깔세는 폐업 등 이유로 공실이 생긴 점포를 몇 달 치 월세를 한꺼번에 내고 빌리는 것을 말한다. ‘임대료를 미리 깔아놓고 장사한다’는 뜻이다. 전문가들은 “시장 상황과 맞지 않는 임대차법과 집주인 실거주 규제 때문에 변종 임대차 계약이 성행하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평가한다.

◇실거주 규제+임대차법에 깔세 성행

깔세가 아파트 같은 일반적 주택 시장까지 번진 주요 원인으로 작년 7월 주택임대차법 개정이 꼽힌다. 계약갱신청구권(2+2년)과 전·월세 상한제(5%룰)가 시행되기 전만 해도 세입자와 집주인이 서로 사정을 봐주면서 이사 날짜를 조율하는 일이 흔했다. 하지만 지금은 집주인이 임차인에게 계약 만료 이후에 집을 빼도록 선의를 베풀었다가는 자칫 전세 계약이 2년간 자동 갱신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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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양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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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의 양도세 규제 강화도 깔세를 부추긴 원인으로 꼽힌다. 과거 1주택자는 10년 보유만 해도 매각 차익의 80%까지 양도세를 면제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같은 혜택을 받으려면 10년간 실거주까지 해야 한다. 통근이나 자녀 교육 등의 이유로 다른 지역에 살던 집주인이 실거주 요건을 채우려 세입자를 내보내고, 세입자는 새 거주지를 구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깔세까지 찾게 된다.

임대차법과 양도세 규제로 최근에는 집주인과 세입자가 계약 갱신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서울 서초구의 30평대 아파트를 소유한 50대 이모씨는 양도세 감면을 위해 본인이 입주하기로 하고 계약 종료 6개월 전 세입자에게 통보했다. 이씨는 입주 전 인테리어 공사 견적을 내기 위해 자기 소유 집을 방문하려고 했지만, 세입자는 문조차 열어주지 않았다. 이씨는 “세입자를 내보내지 않으면 내가 세금 폭탄을 맞으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며 “이런 사정을 이해 못 하는 세입자가 괘씸하다”고 말했다.

◇전세난에 깔세로 내몰리는 세입자들

전문가들은 깔세가 세입자나 임대인 모두에게 위험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깔세는 보통 계약서를 쓰지 않고 전입신고도 안 하는 조건이어서 세입자는 법적 권리를 보장받을 수 없다. 깔세는 임대료 전액을 선지급하는 게 관행인데, 몇 달 치 월세를 미리 받은 집주인이 집을 다른 사람한테 팔아버리면 금전적 손실을 보상받기 어렵고, 새로운 집주인이 퇴거를 요구할 때 대항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

집주인 역시 깔세 세입자가 계약 기간보다 더 살겠다며 버티면 내쫓을 명분이 없다. 현행 임대차법상 갱신 계약은 무조건 2년을 보장하게 돼 있다. 몇 달만 거주하기로 합의했다 하더라도 세입자가 “계약이 갱신된 것”이라며 2년 거주를 주장할 수 있다. 실제로 집주인과 세입자가 1년만 계약을 연장하기로 합의했다가 세입자가 말을 바꾼 분쟁 사례가 최근 법률구조공단 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에 접수됐다. 조정위는 세입자 편을 들었고, 집주인은 세입자를 배려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셈이 됐다.

전문가들은 시장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규제가 심각한 전·월세난을 불러왔고, 무주택 서민들을 깔세 시장으로 내몰고 있다고 지적한다. 권대중 명지대 교수는 “시장에 전·월세 매물이 턱없이 부족하니 일부 세입자는 깔세라도 구해야 하는 처지에 내몰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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