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 박물관. 사진 출처=노벨 재단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120년전 스웨덴의 발명가 겸 기업가 노벨의 유언으로 시작된 '노벨상'은 현대에 들어서면서 한 국가의 과학기술은 물론 사회ㆍ정치ㆍ경제 등 총체적 역량을 과시하는 장이 됐다. 한국 사회가 유난히 노벨상에 민감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그러나 이웃 일본이 과학분야에서만 올해까지 25명의 수상자를 배출한 반면 한국은 2000년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평화상을 빼면 단 한 명도 없다. 한국 과학계에선 연륜이 짧고 그동안 지원도 부족했던 기초과학의 부진과 젊은 과학자들의 자율적ㆍ창의적 연구를 방해하는 후진적 연구 문화, 고립된 한국의 과학 생태계 등을 원인으로 꼽고 있다.
◇‘가장 중요한 발견’이 기본
"이런 연구도 열심히 하면 노벨상을 준다고 하니 희망을 갖고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4일 올해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자로 인체가 매운 맛, 통증, 차갑고 뜨거운 온도 등을 느끼는 원리를 규명한 데이비드 줄리어스·아뎀 파타푸티언이 결정된 후 한희철 고려대 의대 교수가 내뱉은 말이다. 남들이 보기엔 ‘호기심 충족’ 수준으로 쓸데 없어 보일 수 있지만, ‘가장 중요한 발견’을 첫 번째 원칙으로 삼는 노벨과학상의 기준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다는 것이다.
이처럼 노벨과학상은 기초과학의 발전에 혁혁한 공로를 세운 학자들이 주로 수상을 한다. 그러나 이 같은 기준은 한국이 아직까지 노벨과학상 수상자를 배출하지 못한 가장 큰 약점으로 손꼽힌다. 우선 1960년대가 되어서야 기초과학 연구가 시작돼 ‘축적의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다. 올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마나베 슈쿠로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가 1960년대 3차원 기후예측모델을 개발한 공로를 인정받은 게 한국에는 모범 사례다. 한국에선 당시 기상학이라는 개념조차 정립돼 있지 않았다.
또 한국은 기초과학보다는 응용과학에 인재 및 학계의 연구가 치우쳐 있다. 그동안엔 정부의 정책·재정적 지원도 성과 중심의 응용과학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기초연구에 대한 재정 투입 규모가 2017년 2조원대에서 올해 4조원대로 2배 이상 늘어나는 등 집중적인 투자가 이뤄지고 있다. 과학계에선 ‘정치 바람’을 타지 않는 꾸준한 투자 및 정책적 지원이 이뤄져야 20~30년 내에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김경학 한양대 교수는 "정부 부처에서도 국가 발전 방향 및 관심 주제 외에 새로운 분야의 원천기술 개발이나 창의적 도전적 연구에 대한 지원과제도 많이 개설해 운영하고 있다"며 "여태 노벨상을 왜 못 탔냐는 것을 지적하기보다는 이제는 노벨상을 탈 시기가 오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자료사진. 기사와 관련이 없음.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자율과 창의, 독창성’ 보장해야
노벨과학상 수상의 가장 큰 조건 중 하나는 바로 연구 업적이 독창적이며 사회적·기술적으로 파급력이 강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율적이고 창의적인 연구 활동이 보장되어야 가능하다. 또 ‘반짝이는 아이디어’나 도전 정신이 필요해 대체로 학자들이 30~40대 젊은 나이에 업적을 세운 후 나이 들어 상을 받게 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광양자설을 제시해 192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앨버트 아인슈타인이나, 불확정성원리의 연구와 양자역학 창시의 업적으로 1932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같은 대학자들도 20대 때 주요 업적을 세웠다.
실제 한국연구재단(NRF)이 2019년 발표한 ‘노벨과학상 종합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최근 11년간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의 연구 결과를 분석해보니 평균 38세 때 주요 업적이 된 연구를 시작해 69세쯤 노벨상을 수상하는 식의 연대기적 패턴을 보였다.
문제는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은 최저임금 등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연구 수당에 허덕이며, 과도한 행정 업무, 각종 연구 비리 등 갑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성과 위주의 연구에 목을 매고, 취업이나 진로, 성적, 급여 등을 좌우하는 교수들의 권위에 눌려 자율·창의적 연구는 꿈도 못 꾼다는 지적이 많다. ‘촉망받는 학자’였던 교수의 연구실에서 일한 덕분에 ‘과제 지옥’에 시달리다 간신히 졸업한 후 대기업에 취직하면서 과학자의 꿈을 접은 A씨가 대표적 사례다. B씨도 연구실에서 온갖 일을 도맡았지만 지도교수와의 마찰로 졸업이 2년이나 늦어지면서 전공이었던 뇌공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고 말았다.
이준영 울산과학기술원(UNIST) 대학원생은 "현재는 교수가 학생에게 위력을 가하기 쉬운 수직적 연구실 문화여서 자유로운 연구를 하기 어렵다"면서 "외부에서 공람 가능한 행정 시스템, 객관화된 졸업 기준 및 외부 위원을 포함하는 졸업 제도 등을 통해 개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수지 KAIST 대학원생도 "외국의 노벨과학상 수상자들은 아마 졸업 후 취업 걱정, 생계, 지도교수와의 불화 때문에 고민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자유로운 연구 주제를 선택할 수 있고 안정적인 재정 지원을 받아 본 대학원생들은 극소수"라고 꼬집었다.
2020년 노벨 경제학상 발표. 자료사진. [이미지출처=연합뉴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한국 과학계의 품을 넓혀라
최근 노벨과학상은 대부분 국제 협력 연구를 통해 공동 수상하는 경우가 많다. 또 미국, 유럽, 일본 등 100여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학계의 ‘네트워크’가 큰 작용을 하고 있다. 일종의 ‘생태계’가 구성돼 있어 중요한 연구·발견의 경우 서로 인용하고 토론하고 공동 연구하면서 발전시켜 나간다. 그러나 ‘변방’에 속한 한국의 과학자들은 아직까지 인재풀이 좁고, 국제 과학계 핵심과의 교류가 적다. 또 학문적인 교류가 미국 쪽에 치우쳐 있다.
NRF 보고서는 "우리나라 연구자들이 해외 유수의 연구자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국제 연구 협력을 효과적으로 이끌어 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면서 "또 정부의 적극적인 교류 지원과 국내 연구자들의 성과 홍보도 동반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봉수 기자 bskim@asiae.co.kr
<ⓒ경제를 보는 눈, 세계를 보는 창 아시아경제(www.asiae.co.kr) 무단전재 배포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