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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한국에 사는 '평양시민'... "인도적 차원에서 돌려보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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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영화 '그림자꽃'의 이승준 감독
한국일보

이승준 감독은 김련희씨는 정치를 잘 모르고 어려움 없이 살았던, 평범한 평양시민이라고 말했다. 한지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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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치료를 위해 중국에 머물렀다. 브로커에게 한국에 가면 돈벌이가 좋다는 말을 들었다. 돈이 급해 한국행을 택했으나 곧바로 돌아올 수 없음을 깨달았다. 자신은 가지 않겠다고 뒤늦게 주장했으나 여권을 지닌 브로커는 탈북 일행에 문제가 생길까 봐 사정을 들어주지 않았다.

한국에 가자마자 돌려보내 달라고 하면 될 줄 알았다. 국가정보원은 조사를 하며 전향서에 서명을 해야 풀어준다고 했다. 자신도 모르게 한국 국적을 지니게 됐고, 북한으로 돌아갈 길은 막혔다. 2011년부터 한국에서 표류 중인 ‘평양시민’ 김련희씨의 사연이다. 다큐멘터리영화 ‘그림자꽃’(27일 개봉)은 김씨의 기구한 사연을 통해 남북한의 지금을 짚는다. ‘그림자꽃’의 이승준 감독을 22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 본사에서 만났다.

이 감독은 김씨를 2015년 8월 만났다. 한 일간지 보도로 김씨의 사연을 알게 된 이후다. 2019년까지 4년가량 김씨의 일상과 투쟁을 카메라에 담았다. 김씨는 평양에 있는 남편과 딸, 부모님에게 돌아가기 위해 주한베트남대사관에 망명을 시도하거나 북한으로 추방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간첩을 자처하기도 한다.

김씨는 한국에 들어오기 전 한국사회를 동경하지 않았고, 한국에 온 후엔 동화되려 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한국은 이상한 곳이다. 톨게이트를 통과할 때마다 도로 사용료를 내는 것도, 노후대책이나 평생 내 집 마련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저 고향에 돌아갈 마음뿐인 김씨는 평안도 사투리를 쓰며 한국에서 좌충우돌한다. 이 감독은 "김씨 송환은 법적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하나 정부가 인도적인 차원에서 고려할 수 있을 것"이라며 "체제 선전에 활용될 수 있다는데 한국 국력을 생각하면 통 크게 접근해야 할 일"이라고 주장했다.

영화는 김씨를 통해 새로운 이산의 아픔을 조명한다. 탈북자들은 가족과 자유롭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다. 남북한 정부는 6·25전쟁으로 만날 수 없게 된 이산가족의 아픔을 주로 주목한다. 이 감독은 “탈북으로 새로운 형태의 이산가족이 생겨났다”며 “대북 제재와는 별도로 민간교류가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는 평양에 사는 김씨 가족의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감독은 “핀란드 친구 감독을 2차례 평양에 방문하도록 해 촬영을 했다”고 말했다. 북한 당국의 촬영 허가를 받기까지 1년을 보냈다. 김씨의 남편이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해 출퇴근하는 모습, 그가 퇴근 후 동료와 북어를 안주 삼아 생맥주를 마시는 장면, 김씨의 딸이 사회초년병으로 식당에서 일하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구호만 넘치는 곳이 아닌, 삶의 냄새가 배인 평양이 묘사된다. 이 감독은 “북한의 일상이 보여지는 게 중요하다고 봤다”며 “북한인들이 한국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영화 제목은 원래 ‘달의 바다’였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을 가리킨다. “우리가 보지 못하는 어떤 면을 이 영화를 통해 보자는 의미”로 지었다. 하지만 뜻이 잘 전달되지 않아 ‘그림자꽃’으로 제목을 바꿨다. 이 감독은 “꽃은 색깔과 향기가 있어 아름다운 존재인데 그림자꽃은 형체만 남아 있는 것”이라며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인 가족이 떨어져서 살게 된 현실을 상징한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자신의 의사와 달리 2011년 한국 땅을 밟은 김련희씨는 평양시민의 정체성으로 한국에서 살아가며 북한 송환을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엣나인필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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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이후 김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이 감독은 “김씨가 북한 술과 화장품 등을 파는 가게를 열려고 한다”고 전했다. “물품은 다 들어왔는데 외교부 허가가 아직 안 났다”며 “한국 사람들이 북한 물건을 한 번씩 써 보면 서로 좀 가까워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라고 한다”고 덧붙였다. 이 감독은 김씨에게 “북한으로 돌아가면 뭐 할 생각이냐”고 물었다고도 한다. “남한 사람들 전문 안내 일을 하고 싶대요. 남한에서 배운 폭탄주도 만들어주고요.”

이 감독은 ‘달팽이의 별’(2012)로 암스테르담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한국 최초로 대상을 받았다. 암스테르담다큐멘터리영화제는 ‘다큐멘터리의 칸영화제’로 불린다. 이 감독은 지난해 ‘부재의 기억’으로 제92회 미국 아카데미영화상 시상식 단편 다큐멘터리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기생충’의 오스카 4관왕 빛이 워낙 강렬해 가려졌으나 한국 영화사에 기록될 성취다.

이 감독은 두 작품을 준비 중이다. 하나는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의 보상금 반환 문제를 다룬다. 이 감독은 “1년 전부터 피해자들 인터뷰 등을 촬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 다른 하나는 굉장히 정치적인 이슈를 다룬 작품인데 지금은 말할 수 없다”고 밝혔다.

라제기 영화전문기자 wender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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