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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2030 여성 우울은 호르몬 문제’라는 사회, 저변의 가족 문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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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하미나 작가

우울증 겪고 있는 2030 여성 31명 인터뷰해

청년 여성 우울의 맥락 속 ‘가족’과 ‘간극’


한겨레

지난 21일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쓴 작가 하미나씨가 서울 은평구 불광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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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유독 여성의 질환을 설명할 때는 생물학적 원인을 더 들먹일까요?”

우울증은 연령대와 지역을 불문하고 여성에게 더 흔한 질병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우울증 및 다른 흔한 정실질환> 보고서(2017년)에서 전세계적으로 남성(3.6%)보다 여성(5.1%)에게 우울증이 더 흔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정신의학 교과서들은 그 원인을 대체로 여성 호르몬에서 찾는다. 생리전증후군, 산후우울증, 갱년기우울증 등 우울증은 여성의 생애주기별로 세분화되기도 한다. 지난 21일 서울 은평구에 있는 작업실에서 <한겨레>와 만난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미괴오똑)>(동아시아)을 쓴 하미나 작가는 “여성 우울에 대한 문제를 다룰 때 간단한 답을 바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성 호르몬 때문’이란 간단한 답은 여성이 겪는 사회문화적 맥락을 지울 뿐 아니라 여성을 감정 관리도 못하는 취약한 존재로 만들기 때문이다.

여성의 우울은 오직 호르몬에 휘둘린 결과일까? 하 작가는 답을 찾기 위해 우울증을 겪고 있는 31명의 여성을 만났다. 조울증 진단을 받은 당사자이기도 한 그는 “내 고통을 잘 해석할 수 있는 언어가 필요했다”며 “나와 내 주변을 넘어 다른 환경에 있는 여성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개개인의 질병 서사가 아닌 개인 뒤에 있는 집단의 경험을 함께 말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우울을 겪는 20대 여성의 증가세를 보면 이를 개인 문제로 치부하긴 힘들다. 지난 4월 국민건강보험공단이 발표한 ‘2016∼2020년 기분장애 질환 건강보험 진료현황’을 보면, 우울증·양극성 장애 등 기분장애 질환으로 진료 받은 20대 여성은 2016년 4만3749명에서 지난해 10만6752명으로 가파르게 늘었다. 최근 5년 사이 144%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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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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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사건이 있고난 뒤였다. 하 작가는 당시 ‘페미당당’이란 여성단체에서 여성 폭력에 맞서 분노하고 싸웠다. 그는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의 우울이 개인의 문제가 아닌 2030 여성의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여성운동을 하면서 다른 여성의 고통, 목소리에 귀기울였다. ‘진심으로 듣는다’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었다. 그는 자주 무력해지고, 자주 우울해졌다. 하 작가는 “내 또래 여자들이 모여 폭력의 역사를 공유하면서 서로 많이 공감했다. 한편으로 나는 피해자였고, 방관자였고, 2차 가해자이기도 했다는 걸 느꼈다. 그 책임을 감당하면서 많이 아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사람의 고통에 같이 힘들어해주고 내 책임도 있다고 자각하는 것은 중요하다”며 “그 덕에 우리 공동체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만난 여성들은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했다. 병원에서 우울증 진단을 받은 ‘환자’였지만 결코 나약한 모습이 아니었다. 그 누구보다 주체적으로 세상과 자신을 이해하려하고, 자기만의 이야기를 써나가는 사람들이었다. 하 작가는 “이 여자들을 우울증이란 무기력한 단어로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이 겪는 고통을 제대로 알고 납득하기 위해 공부를 하고, 병원을 찾고, 사회운동을 하는 등 여러 자원을 이용하는 주체적인 사람들이었다”고 했다.

그와 여자들이 해석해 낸 우울의 ‘맥락’에는 특히 ‘가족’이 있다. 하 작가는 가족 구성원 내에서 딸이 부여받는 역할이 2030 여성들이 겪는 우울과 연관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알아서 잘하는 착한 딸’로 살다가 성인이 된 뒤 우울과 불안이 심화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딸들은 가정 내 분위기를 예민하게 감지하면서 다른 구성원의 기분을 맞춰주고 실망시키지 않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사람이라면 실수할 수도 있고 화낼 수도 있는데 딸들의 이런 모습은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성인이 돼서야 자신의 감정을 들여다보고 표출하게 된 건데 가족들은 ‘갑자기 왜 이러냐’며 당황스러워 한다”고 했다.

가족 가운데 엄마를 향한 이들의 감정은 복잡다단하다. 가부장적 가정 안에서 엄마는 피해자이지만 동시에 가해자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 작가는 “세상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엄마가 자기 이름을 지우고 살길 강요한다”면서 “문제는 가부장제에서 고군분투한 엄마도 여성혐오적인 시각을 체득한다는 점이다. 딸들은 엄마에게 가장 이해받고 싶지만, 엄마와의 대화는 늘 평행선을 달린다. 서로를 사랑하지만 증오하는 엄마와의 관계도 2030 여성들의 우울에 한몫 한다. 2030 여성의 우울이 이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세대에 걸쳐 쌓인 문제”라고 짚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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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1일 <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을 쓴 작가 하미나씨가 서울 은평구 불광동 자신의 작업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 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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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극’은 2030 여성 우울의 맥락을 짚는 또다른 열쇳말이다. 스스로 바라는 삶과 사회가 강요하는 삶의 간극, 격차 사이에 낙하하는 2030 여성들이 있다. “20~30대 여성은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과 스스로 추구하는 가치 사이의 균열이 가장 큰 세대, 그래서 추락하기도 쉬운 세대.” 책 속에 담긴 김새롬 연구활동가(시민건강연구소 젠더와건강연구센터)의 설명이다. 또 하나의 간극은 ‘여성의 빠른 변화’와 ‘사회구조의 느린 변화’ 사이에 있다. 하 작가는 지금의 상황을 ‘과도기 단계’라고 본다. 2030 여성은 더 교육받고, 빠르게 깨친 세대이지만 사회는 그만큼 변하지 않은 ‘과도기’라는 것이다. 그는 “여성에게도 남성과 같은 고등교육 혜택이 주어진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실제 노동 시장에서 여성이 갈 곳, 나아가 오래 버틸 곳이 많지 않다”면서 “여성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세상은 그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이를 현장에서 직접 맞닥뜨리고 있는 이들이 지금의 2030 여성”이라고 지적했다.

여성 우울과 고통을 둘러싼 논의 지형은 다단하다. 이 사이에서 하 작가는 꼭 경계해야 할 점을 짚는다. 그는 “최악의 논의 방식이 ‘네가 뭐가 힘들어, 내가 더 힘들어’와 같이 내 고통으로 응수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작업을 하며 느낀 건 목숨이 위태롭지 않은 고통도 이해받지 못해 더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사소한 고통이란 없다. 고통을 서로 대결하는 게 아니라 누구나 충분히 고통을 말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환경이 돼야 한다. 그래야 그 고통이 공동체의 문제가 되고, 극복 가능한 문제가 된다.”

우울과 고통의 치유는 어떻게 가능할까? 하 작가는 “결국 좋은 공동체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 공동체는 꼭 전통적인 가족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 친구나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다른 이들과 꾸리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를 택할 수도 있는 거다.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기도 하는 유연한 공동체를 상상한다.” 그에겐 페미당당이 그런 유연한 공동체였다. 페미당당은 젊은 페미니스트 활동가 그룹이면서,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이기도 했다. ‘페미 하우스’라는 곳에서 구성원 중 많은 이들이 함께 살았다. 자신을 힘들게 하는 사회문화적 조건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함께 목소리를 내면서 말이다.

2030 여성 우울에 대한 목소리를 모으고, 목소리를 내는 하 작가는 이 사회에 ‘진심으로 듣는 귀’를 요청한다.

“우울에 빠지는 2030 여성들을 위해 우리 사회가 해야 할 건 자명해요. 이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게, 이들이 온전한 시민으로 그리고 청년 노동자로 살아갈 수 있게 그 기회를 만들어 주는 거예요. 2030 여성들의 자살 문제를 정말 해결하고 싶다면 먼저 당사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세요.”

박고은 기자 eu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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