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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박찬수 칼럼] 어떤 나라로 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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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탄소년단(BTS)이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고, 오징어게임이 전세계인이 가장 즐겨보는 드라마에 오르고, 케이(K)-팝이나 케이(K)-드라마, 케이(K)-뷰티가 국제 표준이 됐다고 뿌듯해 하는 뒤안에, 우리 사회의 여섯명 중 한명은 ’선진국’ 혜택에서 배제된 채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게 한국의 현주소라는 걸 OECD 통계는 일깨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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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수|대기자

문재인 대통령은 25일, 아마도 임기 중 마지막이 될 국회 연설에서 “지금까지 초고속 성장해 온 이면에 그늘도 많다. 저출산, 노인 빈곤율, 자살률, 산재 사망률은 부끄러운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라고 말했다. 이 그늘의 깊은 자락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건 그날 아침 보도된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7개 회원국 중 네번째로 높다’는 기사였다. <연합뉴스> 보도를 보면, 2018~19년 기준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16.7%로 코스타리카(20.5%)-미국(17.8%)-이스라엘(16.9%)에 이어 네번째다. 상대적 빈곤율(Relative poverty rates)이란 전체 인구 중 기준 중위소득의 50%에 미치지 못하는 인구의 비율이다. 절대 빈곤은 벗어났을지 몰라도 사회 구성원 다수가 누리는 일정 수준의 생활을 16.7%, 곧 우리 주변의 여섯명 중 한명은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 웹사이트에 올라 있는 상대적 빈곤율에 관한 도표들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우리나라의 65살 이상 노인 빈곤율은 43.4%(2018년 기준)로, 회원국 중 최고 수준이다. 문 대통령이 국회 연설에서 특별히 노인 빈곤율을 언급한 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가난에서도 남녀는 평등하지 않다. 한국은 상대적 빈곤율에서 남녀간 격차가 큰 나라로 세 손가락 안에 꼽힌다. 대다수 국가에서 남녀간 상대적 빈곤율 차이는 크지 않은데, 유독 한국과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서만 여성 빈곤율이 월등히 높게 표시된 그래프를 보는 건 약간 기묘한 느낌을 준다.

이 도표들을 보면서, “대한민국이 어느새 선진국이 됐다”고 자랑스러워하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본다. 정치적 논란이 있긴 하지만 탁월한 사회적 동원 능력과 의료진의 헌신, 시민의 자발적 협조에 기반한 케이(K)-방역의 성공은 한국사회가 유럽·미국과는 다른 측면에서 선진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음을 과시했다. 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21일 중대형 위성발사체 누리호를 자체 기술로 쏘아올린 것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방탄소년단(BTS)이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고, 오징어게임이 전세계인이 가장 즐겨보는 드라마에 오르고, 케이(K)-팝이나 케이(K)-드라마, 케이(K)-뷰티가 국제 표준이 됐다고 뿌듯해하는 뒤안에, 우리 사회의 여섯 중 한 사람은 ’선진국’ 혜택에서 배제된 채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고 있는 게 한국의 현주소인 것이다. 등록금을 마련하려 밤 늦도록 알바를 하는 청년이나, 새벽부터 폐지를 줍는 수많은 노인들의 삶이 2021년 한국사회의 모습임을 이 도표들은 일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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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간 상대적 빈곤율의 차이. 한국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에서 특히 차이가 심하다. 2016년 통계자료다. 출처 : OECD Income Distribution Dateba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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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이라고 그늘이 없을 수는 없다. 미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세계 두번째로 높지만, 미국을 선진국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강대국과 선진국을 손쉽게 혼용해서 쓰는 요즘 상황에서, 우리가 어떤 사회를 지향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건 절실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 도표에서 상대적 빈곤율이 낮은 국가들의 이름을 눈여겨보게 되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우리가 흔히 복지국가 모델로 떠올리는 북유럽 나라들을 이 그래프의 맨 아래쪽(상대적 빈곤율이 낮은 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이슬랜드(4.9%), 덴마크(6.1%), 핀란드(6.5%) 노르웨이(8.3%)의 상대적 빈곤율은 우리나라의 절반에도 채 미치질 않는다.

사회적 불평등과 양극화의 숙제를 단시일 안에 해결하긴 어렵다. 2011년 이후, 한국의 상대적 빈곤율은 완만하지만 조금씩 개선되고 있다는 점도 수치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한 청년들의 절망, 노인들의 빈곤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지 않고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기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자성이 아니더라도, 이런 문제에서 훨씬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 믿었던 진보 정권이 국민 기대에 걸맞는 유능함을 보여주지 못한 것도 부인하긴 어렵다.

내년 3월의 대통령선거는 바로 이런 문제를 직시하고, 어떻게 해소해 나갈 것인지, 이를 위해 정부와 사회 각 부문의 역량을 어떻게 재배치할 것인지 분명하게 국민에게 말하고 지지를 구하는 장이 되길 바란다. 비전이란 바로 이런 것을 또렷하게 국민에게 내보이는 일이다. 요즘 온라인과 신문·방송을 뒤덮는 수많은 의혹과 논란들은 물론 중요하지만, 길게 보면 스쳐 지나가는 회오리 바람일 뿐이다. 더 중요한 건 2021년 한국사회의 빛과 그늘을 제대로 파악하고, 길고 깊은 그림자에 담긴 아픔을 어떻게 줄일 것인지 솔직하고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pc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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