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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좋든 싫든 이렇게 아름다움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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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귀농에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웠습니다. 벌써 일한 지 10년이 넘는 사람이에요. 그런 아내가 여유로운 아침의 맛을 한번 보더니 저보다 더 간절히 귀농을 바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루는 제게 앉아 보라고 각을 잡더니, 한달 수입과 지출을 쭉 써놓고 앞으로 ‘이만큼’만 더 모아 내려가자는 말을 꺼내더군요.

한겨레

[엄마아들 귀농서신] 선무영|시골로 가려는 아들·로스쿨 졸업

사실 청년농부니 귀농귀촌이니 들려오는 소식들이 많기에 아버지 걱정은 노파심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보게 된 르포기사에서 전국의 소멸 고위험 지역 36곳 중 한곳으로 괴산을 꼽았더군요. 괴산의 소멸 위험지수는 0.16입니다. 괴산에 사는 65살 이상의 인구가 100명일 때, 20~39살 여성 인구는 고작 열여섯이라는 의미예요. 제가 가기도 전에 소멸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들으니 찝찝합니다. 귀농이 권장되는 사회라면 좋을 텐데, 그런 분위기였다면 귀농하겠다는 다짐을 써 보내는 아들의 편지가 신문에 실릴 일도 없었을 겁니다. 이제 좋든 싫든 시골은 많은 변화를 겪겠구나 생각해요.

두 해를 지나며 참 많은 것이 바뀌었습니다. 2년 전, 저는 변호사가 되려던 미혼의 로스쿨 재학생이었죠. 지금은 귀농을 앞둔 예비농부이자 주부이며 남편이 되었어요. 제가 인생의 격변을 겪는 동안, 세계는 코로나를 앓았습니다. 그로 인해 자의 반 타의 반, 많은 변화가 따랐죠. 코로나 웨딩으로 ‘변화’를 몸으로 느꼈습니다. 지난 4월 성당에서 올린 결혼식은 방역지침에 따라, 식사 대접이 어려웠습니다. 식사 시간에 식을 올리면서도 작은 떡 한 상자와 답례품으로 준비한 와인 한병이 다이니, 청첩도 최소한으로 했죠. 그토록 바랐던 스몰웨딩이었는데, 코로나가 등 떠밀어 치르니 기분이 묘했습니다. 식 외에도 변화는 이어집니다. 신혼여행도 인적 드문 산으로 들로 떠나는 배낭여행이 되었고, 경기 남부에서 서울 북부로 출근하던 아내는 재택근무와 장기휴가로 출퇴근 없는 삶을 경험했죠. 다시금 출근하는 아내의 스트레스는 전보다 커 보입니다.

다니던 공립 수영장은 문을 닫아 아침이면 즐겨하던 수영도 못 하게 된 지 오래예요. 등산과 조깅도 즐겼는데, 가끔 마스크 쓰지 않은 사람들이 스쳐 지나가니 꺼림칙해졌습니다. 재난지원금도 받았겠다 백신도 맞았겠다 아내와 함께 운동하고 싶어서 6개월치 헬스장을 끊었어요. 10년 전에 다녔던 그 체육관인데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체육관을 빼곡히 두르고 있는 러닝머신은 ‘러너’들로 가득했는데, 지금은 방역수칙에 따라 6㎞/h 이하로만 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고도 열심입니다. 그렇게 우리도 열정 불태워가며 운동하면 좋겠는데, 아내의 퇴근시간에 맞추면 오후 8시에나 운동을 시작합니다.

코로나가 많은 걸 가져갔죠. 제가 잃은 건 소소합니다. 국외여행 할 기회를 날려버리고, 한여름 실내수영장에서 시원하게 물장구칠 기회도 날렸습니다. 또 귀농교육 기회조차 가져갔네요. 전국귀농운동본부에서 모집한 청년귀농학교에 누나와 함께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귀농교육이 비대면 교육으로는 어려운 것이기도 하고, 멀리 시골로 견학도 다녀와야 하는 프로그램이다 보니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에서 교육 진행이 불가하다는 통보를 보내왔다 해요. 담당자분께서 죄송해하면서 전화하셨죠. 이미 입금한 교육비는 전부 환불해준다며 다음 기회에 꼭 보자고 하셨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참 휴대전화를 쥐고 있었어요. 아쉬움에 가까운 주말농장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코로나가 가져다준 것도 있어요. 아내는 귀농에 상대적으로 조심스러웠습니다. 벌써 일한 지 10년이 넘는 사람이에요. 그런 아내가 여유로운 아침의 맛을 한번 보더니 저보다 더 간절히 귀농을 바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일할 수 있는 회사가 있다는 사실에 감사 기도를 올리지만, 퇴근길에 보는 얼굴에조차 ‘회사 가기 싫다’는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하루는 제게 앉아 보라고 각을 잡더니, 한달 수입과 지출을 쭉 써놓고 앞으로 ‘이만큼’만 더 모아 내려가자는 말을 꺼내더군요. 많이 힘든가 얘기를 들어보니 아직 회사에서 디자인하는 것도 좋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즐겁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자기만의 시간을 쌓고 싶다고 하네요. 실컷 운동하지 못하고, 책 읽을 여유도 없고, 하고 싶은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만 가는 게 회사 때문인 것 같다며. 출퇴근으로 하루에 3시간씩 보내니 그럴 법도 하죠.

제 삶은 좋든 싫든 이렇게 변화를 맞았습니다. 때로는 살기 위해서, 때론 더 나아지기 위해서 선택한 변화입니다. 원래 바라던 대로 이뤄진 변화의 시작점은 아닐 테지만, ‘시골’도 변화를 마주하고 있어요. 시골이 시골로 남기 위해서는 누구라도, 무엇이라도 할 수밖에 없으니, 몸부림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까요. 저와 아내는 그 몸부림을 함께하려 해요. 부디 더 나아지는 시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떤 디자이너가 이런 말을 했어요. 모두가 거절하는 것에서부터 아름다움은 시작된다고. 시골은 외면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모두가 꺼리는 곳이기에 전에 없던 아름다움이 시작될지도 모르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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