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설 대목 맞은 울산 태화장
명절을 코앞에 두고 열리는 장은 대목장이다. 연중 가장 큰 장터가 열린다. 어느 장을 가든 그렇다. 어디로 갈까 하다가 10년 만에 울산을 가기로 결정. 가만히 생각해 보니 3년 넘는 시장 구경 중에서 대목장을 맛본 적이 없었다. 신문 게재 일정과 취재 일정이 맞지 않았다. 대부분 일주일 전에 취재를 완료했다. 연휴의 첫 시작, 토요일에 출발했다. 새벽 출발로 귀성 차량을 피했다. 그 덕에 정체 없이 울산에 도착, 이곳저곳을 편히 돌아다닐 수 있었다. 울산 하늘을 보니 시린 하늘이 아니었다. 살짝 포근한 하늘, 조금 있으면 봄이 옴을 알리는 하늘이었다. 봉계와 언양 사이를 지나다가 익숙하고도 낯선 간판을 봤다. ‘신우목장.’ 한동안 출장 다니던 곳이다. 초창기 유기농에 근접한, 맛있는 우유를 생산했었다. 목장 안에 유가공 공장이 있던 곳으로 목장형 유가공의 효시 같은 곳이었다. 잠시 출장 다니던 때가 흐릿해진 간판처럼 잠시 떠올랐다가 이내 사라졌다. 참으로 오래전 일이다.
‘지극히 미적인 시장’ 연재 이래 처음으로 대목장과 일정이 맞았다. 설날을 앞두고 북적북적 절로 흥이 나는 울산 태화장은 겨울과 봄의 한가운데에서 제철을 맞은 물미역이 한창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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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목 맞은 울산 태화장. 명성에 걸맞게 사람이 차고 넘쳤다. 멋도 모르고 차를 대려다가 포기하고 조금 떨어진 태화강국가정원에 주차하고 슬슬 걸어갔다. 태화시장 주변 골목마다 장이 서 있었다. 대목장은 잠시 서서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북적북적하는 장터는 물건이 사지 않더라도 흥이 났다. 오가는 말에는 정겨움이 묻어났다. ‘동해 오일장, 해남 오일장’ 이후 흥과 정을 오랜만에 느꼈다. 예전의 오일장은 이랬을 것이다. 사람의 정이 오갔을 것이다. 지금은 명절이 되어야 겨우 느낄 수 있다. 처음 골목에선 어른 주먹만 한 홍합이 반겼다. 가격은 제법 나갔지만, 지갑에 손이 몇 번 갈 정도로 크고 좋았다. 다른 곳에는 더 큰 녀석이 있었다. 홍합 살만 따로 꿰놓은 것이 있기에 슬쩍 물었다. “홍합을 차례상에 올리나봐요?” “올리죠. 예전에는 이 동네에서 많이 났는데 이젠 안 나요. 그래서 울릉도나 서해 거가 대부분이에요.” 군데군데 사각형 모양의 하얀 고기가 있다. 같이 간 이가 “뭐야?” 묻는다. “상어.” “상어도 차례상에 올려?” “응, 여기는 산적으로 해서 올리고 전라도는 말린 상어를 찜으로 올려.” 시장에는 나물이며, 전감 등 명절 제수가 대세. 대세를 뒤집은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물미역이다. 겨울과 봄의 중간 물미역이 한창이었다. 거짓말 조금 보태서 세 집 건너 하나 있을 정도였다. 대부분은 이웃한 기장에서 온 것. 멀리 완도에서 온 잎이 조금 넓은 것도 있었고, 울산 간절곶 것도 있었다. 미역국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역에 해물이나 소고기 넣고 국을 끓인다. 보통은 마른미역을 불려서 사용한다. 제철에 나는 물미역으로 국을 끓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 생각을 못하기 때문이다. 물미역으로 국을 끓이면 더 맛있다. 어떤 것을 넣든 미역이 주인공이 된다. 미역국이 자신 없으면 라면 끓일 때 미역을 넣어도 맛나다. 마른미역이 줄 수 없는 신선한 바다 내음이 라면에 녹아든다. 기름진 국물은 산뜻해진다. 신김치가 있다면 잘게 썰어 넣으면 더 좋다. 모름지기 제철 식재료의 맛을 이길 수 있는 조미료는 없다. 조미료는 옆에서 거드는 존재일 뿐, 제철 주인공이 좋을수록 존재감은 희미해진다. 기장 미역 앞에는 ‘쫄쫄이’라는 수식이 붙어 있다. ‘쫄쫄이’ 혹은 ‘지네발’이라 부르는 이유는 물살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물살이 아주 센 곳에서 자라는 미역은 미역 잎이 많이 갈라져 있다. 완도에서 나는 미역처럼 잎이 넓었다가는 센 물살을 견딜 수 없기에 잎에 물살이 빠져나갈 통로를 많이 만들었다. 거센 물살과 파도는 미역을 억세게 만들어 오래 끓여도 쫄깃하다. 그래서 쫄쫄이다. 예전 포항 오일장에서 설명했듯이 물미역이 나오면 꼭 같이 먹어야 할 음식이 ‘회’다. 어종불문, 물미역에 회를 싸는 순간 맛이 달라진다. 하우스에서 억지로 키운 상추나 깻잎은 겨울 제철 물미역 앞에서는 용쓰지 못한다. 미역국이나 무침보다는 회에 싸 먹는 물미역 맛이 일품이다. 시장을 떠나는 내 손에는 간절곶 물미역이 한 봉지 들려 있었다. 2000원으로 살 수 있는 제철 식재료다.
어른 주먹만 한 홍합은 지갑에 몇 번 손이 갈 정도로 탐났다. 어종불문, 회를 물미역에 싸서 먹는 순간 그 맛이 달라진다. 미나리 산지에서 함께 구워 먹는 삼겹살. 지금부터 봄까지 미나리 향기를 즐길 수 있는 메뉴다(왼쪽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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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상 올리는 명절 제수 속에서
대세 뒤집은 물미역, 봉지에 2천원
잎이 많이 갈라져 있는 ‘쫄쫄이’
억센 만큼 오래 끓여도 쫄깃해
라면에 넣으면 기름진 국물 ‘산뜻’
울산에서 첫 끼는 추억이었다. 2003년 무렵으로 기억하고 있다. 신우유업에 갔다가 돌아가려고 했더니 연세 지긋하신 사장님의 ‘밥은 먹고 가야 한다’는 고집에 끌려갔던 곳이 봉계에 있는 고깃집이었다. 국도변에서 빤히 보이는, 몇 집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뻘의 목장 사장님과 둘이 먹는 식사가 편하지는 않았지만, 생고기는 참으로 맛있었다. 그 기억을 더듬어 비슷한 곳을 찾아갔다. 생고기만 주문했다. 보통은 고기를 구우면서 생고기는 곁다리 음식으로 주문한다. 굽는 고기는 생략하고 생고기만 주문해 밥하고 같이 먹으면 아주 그만이다. 둘이 간다면 육회 비빔밥 대신 생고기 주문이 훨씬 낫다. 비용도 거의 같다. 따스한 밥 위에 생고기 올려서 먹으면 천하일미다. 채소 가득한 육회 비빔밥하고는 비교 불가다. 술과 함께하면 좋겠지만 없어도 괜찮다. 약간의 아쉬움이 있었다. 생고기와 같이 나온 된장찌개는 훌륭했다. 어디 내놔도 손색이 없었다. 후식으로 나온 식혜도 맛있었다. 정작 주인공인 밥이 부실했다. 공기에 담겨 나온 밥은 온기만 있고 생기는 없었다. 밥은 뚜껑이 닫히는 순간 숨이 죽는다. 밥 윗부분은 빠져나가지 못한 열기가 맺혔다 떨어진 물방울로 인해 습기를 가득 머금고 있었다. 먹는 내내 “아 밥맛만 좋았어도”를 내뱉었다. 일전에 영암의 시골 삼겹살집에서 먹은 밥이었다면 최상이었겠다는 생각도 했다. 밥을 공기에 담고 뚜껑을 닫는 순간 관 뚜껑 닫는다고 생각해야 한다. 편해지자고 하는 일이 밥의 생기를 없앤다. 여기뿐만 아니었다. 그날 저녁과 다음날 점심도 같았다. 봉계유통불고기 (052)262-7477
따스한 밥 위에 생고기 한 점 올려 먹으면 천하일미다. |
따스한 밥 위에 생고기 ‘천하일미’
아직은 비싼 방어…개우럭이 달콤
선바위에서는 미나리 나오기 시작
농장에서 삼겹살과 불판 콜라보
식당마다 생기 없는 공기밥 아쉬워
저녁은 방어진 회센터를 선택했다. 명절 전 제주 방어 시세를 알아보니 예상대로 반값이었다. 10㎏ 방어 경매가가 12월에 20만원선 하던 것이 명절을 앞두고 9만원대까지 떨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회센터에서 방어 시세를 알아보고 적절하면 방어를 선택할 생각이었다. 1월에서 2월 사이, 방어 맛도 얼추 들었을 것이고 가격도 적당해졌을 것이라 생각했다. 가격은 내 생각보다 비쌌다. 방어 대신 지난 삼척처럼 어종을 탐색했다. 회센터 주인장들이 뭐라 뭐라 해도 지나치며 생선의 선도만 봤다. 어시장에서 중요한 것은 ‘물, 즉 선도’다. 가격은 같다. 그러니 물을 잘 봐야 한다. 작은 어시장을 끝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중간, 낯선 물고기가 눈에 띈다. 물어보니 ‘옥돔’이라 하는데 내가 아는 옥돔, 옥두어도 아니다. 이빨도 나 있는 것으로 보아 혹돔 같았다. 한 마리 3만원. 현지에서 꺽저구라 부르는 개우럭 두 마리를 2만원에 회를 떴다. 근처에 있는 초장집에서 소주 한잔과 더불어 회 맛을 봤다. 3만원짜리 옥돔보다는 개우럭이 달콤한 맛이 있었다. 옥돔은 쫄깃한 식감은 있었지만, 맛은 우럭보다 모자랐다. 여기 또한 생고기 먹듯이 밥을 함께하면 좋을 듯싶어 밥을 따로 청했다. 초장집이라 밥에 대한 기대는 없었지만 기대 이하의 밥이 나왔다. 낮에 먹은 생고기집보다도 못했다. 온기조차도 없는 밥이 나왔다. 그나마 회가 맛있었기 망정이지 그대로 나올 뻔했다. 회에, 회무침에, 물회까지 잘 먹었어도 밥맛 때문에 뒷맛이 개운치 않았다. 방어진활어센터 우야엄마 010-3574-0031
선바위, 서 있는 바위가 있는 곳이면 붙는 이름이다. 과천과 사당 사이에도 있고, 영양과 청송 사이에도 있다. 울산에도 있다. 오래전부터 울산 선바위 지역에서는 미나리를 재배했다. 미나리 하면 연상되는 음식이 삼겹살. 선바위에서도 미나리 농장에서 삼겹살과 미나리를 같이 먹을 수 있게 했다. 비닐하우스에서 운영하지 않고 번듯한 건물에서 한다. 목살과 삼겹살, 된장, 김치, 미나리를 고르고 자리에 앉으면 불판이 차려진다. 미나리가 지난주부터 나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봄까지 생생한 미나리 향기를 즐길 수 있다. 미나리와 삼겹살의 궁합은 좋았다. 적당히 익은 김치 또한 훌륭했지만 여기 또한 밥이 문제였다. 반만 담긴, 생기 없이 물기만 가득한 밥은 힘이 하나도 없었다. 볶음밥 재료는 공짜로 준다는 문구를 보면서 대신 밥이나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선바위 미나리애삼겹살 (052)211-0880
내가 갔던 곳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우리나라 식당 대부분이 밥을 함부로 대한다. 좋은 쌀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밥 지은 다음이 중요하다. 밥맛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 공깃밥은 버려야 한다. 정부는 쌀 소비가 줄었다고 끌탕만 하지 말고 맛있는 밥을 어떡하면 내줄지를 고민해야 한다. 밥, 더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 김진영 식품 MD
매주 식재료를 찾아 길을 떠난다. 먹거리에 진심인 역마살 만렙의 27년차 식품 MD
김진영 식품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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