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20일 대통령실의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 이전을 공식화하면서 70여 년에 걸친 청와대 시대도 종언을 고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청와대 터는 고려 숙종 시절인 1104년 완공된 남경 궁궐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조선 태조 4년(1395년) 경복궁이 창건되면서는 경복궁의 북쪽 후원에 속했다.
일제강점기인 1937년 조선총독부는 청와대 구본관 자리에 총독 관저를 세웠다. 그러면서 총독부는 증산교 계통 신흥 종교인 보천교에서 전라도 정읍에 지은 총본산 '십일전' 지붕의 청기와를 떼내 관저 지붕에 올렸다.
광복 이후 이 건물은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 미국 육군 중장의 관저로 쓰이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관저·집무실로 물려받았다. 이승만 집권기 청와대는 과거 경복궁 후원 터를 지칭하는 '경무대(景武臺)'로 불렸다. 4·19혁명 이후 경무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감안해 윤보선 대통령은 미국 백악관(White House)과 대조되는 '청와대'라는 이름을 골랐다.
청와대가 협소하고 노후화됐다는 지적이 나오면서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건물을 대대적으로 개보수했다. 당시 청와대 1층은 대통령 집무실, 2층은 대통령 가족 생활 공간이었다. 현재의 청와대 본관과 관저, 춘추관(프레스센터)이 신축된 것은 1991년 9월로, 노태우 대통령 시기다. 신축 공사 중 조선 중기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祉·천하 제일의 좋은 땅)'라는 표석이 발견돼 화제를 낳았다. 이어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옛 본관을 전부 철거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참모진과 더 긴밀히 소통하기 위해 웅장미를 강조한 청와대 본관 구조를 바꾸려다 포기하기도 했다.
청와대는 현대사의 굴곡을 고스란히 품은 공간이다. 1979년 10월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용지 내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숨졌다. 2016년 말 청와대 앞은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탄핵을 요구하는 국민의 촛불집회가 이어졌고 그해 11월엔 청와대 별관이 사상 처음으로 검찰 압수수색을 당했다. 윤 당선인 역시 검찰총장에 재임 중이던 2019년 12월 울산시장 선거에 청와대가 개입한 혐의와 관련해 청와대 압수수색을 단행한 바 있다.
[이종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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