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2.04 (수)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대선 때 김건희 손배청구한 그 권리…민법 '인격권' 추가한다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중앙일보

16일 오후 서울 상암동 MBC 사옥에 걸린 전광판에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의 '7시간 전화 통화' 내용을 다루는 MBC 프로그램 '스트레이트'가 방영되고 있다. 연합뉴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배우자 김건희 여사는 지난 1월 17일 MBC 〈스트레이트〉에 통화 녹음 파일 등을 제공한 인터넷 언론사 서울의소리 관계자들에 대해 1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김 여사는 소장에서 "피고들의 불법적인 녹음 행위와 법원의 가처분 결정 취지를 무시한 방송으로 인격권과 명예권, 프라이버시권, 음성권을 중대하게 침해당했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김 여사가 침해당했다고 주장하는 '인격권'은 현행 민법에는 어느 곳에도 나오지 않는다. 인격권이란 인간이 자신의 인격적 이익에 대해 가지는 권리다.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는 헌법 제10조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1958년 민법이 제정된 이래 여태까지 인격권을 구체적으로 정의한 적은 없다. 그간 인격권은 개별 사건에 대한 법원과 헌법재판소 판례 등을 통해 그 실체가 인정됐을뿐이다.

64년 만에 인격권이 기본법인 민법에 정식으로 명문화된다. 법무부는 5일 인격권 및 인격권 침해 배제, 예방, 회복 조치와 손해배상 청구권 조항을 신설하는 민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인격권은 1100개가 넘는 민법 조항 가운데 맨 앞쪽에 추가된다.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는 내용의 민법 제3조 바로 다음이다.

중앙일보

민법에 신설되는 ‘인격권’ 규정.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민법 개정안은 제3조의2 조항을 신설하고 ①항엔 "사람은 생명·신체·건강·자유·명예·사생활·성명·초상·개인정보, 그 밖의 인격적 이익에 대한 권리를 가진다", ②항에 "사람은 인격권을 침해한 자에 대하여 침해를 배제하고 침해된 이익을 회복하는 데 적당한 조치를 할 것을 청구할 수 있고, 침해할 염려가 있는 행위를 하는 자에 대하여 그 예방이나 손해배상의 담보를 청구할 수 있다"는 조항을 넣었다.

이런 내용의 인격권은 법인에도 똑같이 부여된다. 34조의2항을 신설해 "제3조의2는 그 성질에 반하지 아니하는 범위 안에서 법인에 준용한다"는 조항을 추가했다.

인격권이 도입되면 사회적 병폐로 부상한 불법 녹음·촬영, 직장 내 갑질, 학교폭력, 온라인 폭력, 가짜뉴스, 디지털 성범죄, 메타버스 내 인격 침해, 개인정보 유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격권 침해 범죄의 예방과 회복, 손해배상이 가능해진다.

이런 인격권 침해 범죄는 헌법 10조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라는 인격적 이익을 훼손하는 심각한 범죄 행위이며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대법원 판례와 헌법재판소 결정례 등이 인격권을 인정하고 있지만, 민법상 공백 탓에 그 적용 범위는 제한적이었다.

법무부가 뒤늦게나마 인격권을 명문화하기로 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법무부 관계자는 "보다 넓고 다양한 분야에서 인격권 침해로 인한 법적 책임이 인정될 수 있을 것"이라며 "인격권이 침해당하거나 침해당할 우려가 있는 상황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실효적인 구제 수단도 확보될 수 있다"고 기대했다.

예를 들어 ‘n번방’ 일당처럼 연예인이나 일반인 ‘딥페이크 영상’을 편집·합성·유포해 개인의 명예와 초상권 등을 심각하게 훼손한 경우(성폭력범죄처벌특례법 위반) 즉각 삭제 조치는 물론 손해배상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중앙일보

시민단체 직장갑질119는 11일 ‘5인 미만 갑질 실태 보고서’를 공개하며 관련법 개정을 촉구했다. 중앙포토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민법에 인격권 규정을 신설하려는 시도는 2004년과 2014년 두 차례 있었지만 모두 실패했다. 이번 개정법은 법무부 법무자문위원회(미래시민법포럼)서 제안된 법안을 기초로 마련했다. 법무부는 "법안을 마련하기 위해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위스, 일본, 대만, 중국 등 주요 해외 입법례와 판례를 참고했으며 인격권에 관한 연구용역, 논문대회, 외부전문가 자문 등을 실시해 국민과 전문가들의 의견을 폭넓게 수렴했다"고 밝혔다.

이번 법 개정엔 단순 법 규정 신설 이상의 의미가 있다. 법무자문위원으로 민법 개정 과정에 참여한 김상중 고려대 로스쿨 교수는 "그동안은 당연한 걸(인격권) 당연히 받아들이는 것 자체를 굳이 설명해야 했다면, 법 개정 이후엔 '당연한 것을 공식적으로 밝힘'으로써 불필요한 논의가 정리된다는 차이가 있다"며 "특히나 민법상 네 번째 규정으로 신설됐다는 점은 인격적 가치가 이 정도로 높은 지위를 부여받고 그 보호 필요성이나 논증의 힘까지 덩달아 커진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법무자문위원인 장보은 한국외대 로스쿨 교수는 이번 민법 개정안이 인격권 침해의 예방(제3조의2 2항)에 방점을 둔 것에도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장 교수는 "시대가 흐르면서 재산권뿐 아니라 인격권도 민법에서 보호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가 된 것을 이제 반영하게 됐다"며 "특히 인격권은 한번 침해가 되면 손해배상만 가지고는 해결이 안 되는 경우들이 많기 때문에 사전적인 예방 조치도 반드시 필요했다"고 말했다.

앞으로 인격권을 둘러싼 법적 제고는 계속될 전망이다. 장 교수는 "앞으로는 개인정보 침해 사안에서 개인정보의 자기결정권이란 개념을 어떻게 볼 것인지, 메타버스에서의 인격권을 어디까지일지, 초상권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퍼블리시티권은 어디까지 보호할 수 있을지 등 다양한 부분에서의 문제의식이 파생될 수 있다"며 "우선은 한 조문이라도 의미를 담아서 중요한 부분 먼저 개정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용환 기자 jeong.yonghwan1@joongang.co.kr

중앙일보 '홈페이지' / '페이스북' 친구추가

넌 뉴스를 찾아봐? 난 뉴스가 찾아와!

ⓒ중앙일보(https://www.joongang.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