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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자작나무 숲] 윤치호와 서정주 러시아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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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프랑스어 배운 윤치호, 78세에 러시아어 익힌 서정주

인간에게 외국어는 속마음의 고삐를 풀어주는 자유의 도구

한글·한국어 확산 집착은 식민주의의 또 다른 모습 아닌지

윤치호는 복잡한 인물이다. 조선 최초 일본 유학생, 조선 최초 영어 통역관에 덧붙여, 최소한 내가 알기로 조선 최초 영문 일기 기록자다. 미국 유학 시절 시작된 일기는 무려 50여 년간 지속되었다. 첫 문장이 이렇다. ‘지금까지는 한글로 썼으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모두 표현하기에는 아직 어휘가 충분하지 않아서 영어로 쓰기로 마음먹었다.(1889.12.7)’

어휘만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공부하던 10대 때부터 영어 개인 교습을 받고, 상하이 선교사 학교를 거쳐 미국 남부 명문 대학을 다녔다. 졸업 후에는 역시 선교사 학교에서 교육받은 중국인 신여성과 결혼했다. 젊은 시절 일기 곳곳에 ‘내 소중한 달링 베이비’를 향한 사랑과 그리움이 배어 있다. 심지어 ‘I am hungry for her’ 같은 원색적인 표현도 나온다. 과연 영어가 아니었다면 그런 언술이 가능했을까? 어휘가 아닌 의식과 문화 문제다. ‘인간에게 말이 있는 것이 그들의 속마음을 감추기 위해서’(스탕달)라면, 인간에게 외국어가 있는 것은 속마음의 고삐를 풀어주기 위해서일 수 있다. 그때 외국어는 곧 자유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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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는 프랑스어도 배웠다. 1896년 고종의 외교 사절단으로 러시아를 방문한 그는, 그 나라를 서구 최강 대국이라 믿으며 의지하려던 조정 대신과 달리, 이름뿐인 제국의 실체를 발 빠르게 간파했다. ‘러시아 건축과 의복에는 아시아적인, 따라서 그로테스크한 것이 많다’며 무시하고, 서구와 비교해 맘에 드는 것은 식물원, 정원, 천문대, 그리고 여자밖에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페테르부르크에 체류하는 두 달 반 동안 러시아어 대신 프랑스어 교습을 받더니, 공식 임무가 끝나자 대학에 남아 조선어를 강의해달라는 요청도 물리친 채 아예 파리로 갔다. 그런 그가 파리에서 외로움에 지쳐 회의하는 대목이 있다. ‘설령 프랑스어를 잘하게 된들 내가 프랑스어로 뭘 하겠는가! 왜 불필요한 지적 사치, 결코 내가 누리지도 못할 사치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토록 가슴 아픈 이별을 해야 하나? 아, 헛되고 헛되도다!’

일본어와 영어가 실용어라면, 프랑스어는 교양의 언어였다. 개명 안 된 동양 약소국 시민한테는 쓸모없을 문화 자본마저도 그는 축적했다. 서구 문명권 엘리트가 되고 싶었던 걸까? 일본에 있으면서 영어 배우고, 러시아에 있으면서 프랑스어 배우는 개화기 조선인의 다부진 야심을 상상해본다. 페테르부르크 호텔 방에서 홀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읽으며(영어로) 일기 쓰는(역시 영어로) 저 고독한 우월감을 상상해본다. 동시에 온몸으로 감당했을 열등감의 동통(疼痛)도 상상해본다. 이것이 구한말 ‘세계인’의 초상이다. 윤치호는 외국물 먹은 동양인의 서구주의 편향성을 비난한 바 있으나, 실제로는 아름다운 서양과 추한 동양의 이분법을 떨쳐내지 못했다. ‘힘’에 대한 자의식은 그를 우월감과 열등감으로 분열시켰으며, 미처 여물지 않은 정체성을 과도기적 갈등과 자기모순으로 몰아붙였다. 자주독립을 열망하던 개혁론의 균열은 거기서 왔다.

한 세기 뒤 또 한 명의 흥미로운 어학 연수생이 등장한다. 서정주 시인이다. 1992년 당시 78세였던 이분 목표는 코카서스 장수촌에서 3년간 정양하며 러시아어를 배워 젊은 시절 애독했던 도스토옙스키를 원어로 읽는 것이었다. 그곳 황혼 녘 구름이 좋아서 간다고 했다. 비록 두 달 여행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노시인은 흡사 그리운 먼 옛날을 찾아가는 방랑자 행색으로 구소련에 날아가 궁핍한 삶의 ‘우리네 옛날만 같은/ 또 우리네의 시골만 같은/ 찐한 찌린내’ 맡으며 반세기 전 헤어졌던 육친 만나듯 반가워했다. 두 민족이 공유한 고통의 냄새 안에서는 러시아어도 동떨어진 외국어가 아니었다. 가령, 길에 핀 해당화의 러시아 이름 ‘쉬포브니크’가 시인 귀에는 ‘쉬 뽑히지 말라’로 들렸으니, 그것은 번역이 필요 없는, 모든 힘 약한 존재들의 공용어였다. 그래서 시인에게는 ‘너희들도 인제부터는 절대로 쉬 뽑히지 마라’라는 축원의 기도가 절로 나왔다.

21세기 한국은 이제는 ‘절대로 쉬 뽑히지’ 않을 당당하고 주체적인 나라가 되었다. 게다가 한국어를 세계 널리 가르치기조차 한다. 그러나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라는 어느 영문학자의 통렬한 인식처럼, 여전히 힘센 언어의 족쇄에 붙잡혀 있고, 여전히 실용 언어에 몰입해 있다. 실용(힘)의 논리로만 언어를 택하거나 팽개치는 한, 그리고 특정 언어의 기득권을 고집하는 한, 마음의 식민주의는 사라지지 않는다. 한글과 한국어 확산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그 또한 실은 뒤집은 형태의 식민주의가 될는지 모르겠다.

[김진영 연세대 노어노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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