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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시력잃을 것" 의사의 경고…'두눈'으로 월드컵 본 서지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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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김성진 기자] [편집자주] 장기기증자 유족들은 창작곡 '선물'에서 세상 떠난 기증자를 '꽃'이라 불렀다. 꽃이 지는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교통사고를 당했고 누군가는 뇌출혈을 겪었다. 하지만 이들 장기 기증으로 생명이 새로 피어났다. 장기 기증은 줄어드는 추세다. 지난해 하루 평균 6.8명이 이식을 기다리다 사망했다. 장기기증자 유족과 이식인에게 '장기기증'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물었다.

[다시 핀 꽃-장기기증]⑦동갑내기 남학생에게 '각막' 이식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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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2월 각막이식 수술을 받고 붕대를 푸른 서지원씨(28) 모습./사진제공=서지원씨.


"보여요, 진짜로 보여."

12년 전 겨울 어느 날 오후 2시쯤. 경상남도 양산시 부산대학교 병원에서 서지원씨(28)가 눈을 뜨고 한 첫마디였다. 눈앞에 의사 얼굴이 또렷했다. 서씨는 "'기쁘다'는 느낌보다 두 눈이 잘 보여 신기했다"고 했다.

서씨에게는 원추각막질환이 있었다. '진행성 질환'이다. 태어나서 한동안은 두 눈이 잘 보이지만 각막 중심부가 서서히 얇아지고 돌출해 결국에는 시력을 잃게 된다. 통상 한쪽 눈에 먼저 발병한 뒤 다른 쪽 눈도 뒤늦게 발병한다. 20~60세 사이 천천히 발생하는 게 보통이다. 서씨는 진행이 빨랐다. 중학교 3학년 때 오른쪽 눈 시력이 확 떨어졌다. 왼쪽 눈 시력 1.5, 오른쪽 눈 0.3이었다.

발병 전 서씨는 활달한 여학생이었다. 피구와 배드민턴을 좋아했다. 그러다 양쪽 눈 시력이 불균형해지자 신체 능력도 떨어졌다. 서씨는 안경 한쪽의 도수를 높였지만 적절한 해법은 아니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안과에 가 검사를 받았더니 의사가 "왜 이제 왔느냐"며 "당장 큰 병원에 가라"고 했다.

큰 병원 의사는 서씨에게 '병이 이 정도로 진행됐는데 아프지 않았냐'라고 물었다. 서씨는 고등학교 생활을 하는 와중에도 눈에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병이 이미 크게 진행된 상태였다. 서씨는 의사가 어머니와 독대하는 동안 문 밖에서 어머니가 우는 소리를 들었다. 의사는 서씨의 각막이 워낙 손상돼 조금 있으면 '뚫릴 수 있다'며 이식 말고는 답이 없다고 했다.

처음에 서씨는 이식 신청을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장기·조직 기증 희망자였다. 기증이 이뤄지려면 누군가 숨져야 한다는 사실을 서씨는 알았다. 1년 동안 한의원에 다녔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러다 종교 행사에서 '시력을 잃든 않든 내게 사명(使命)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이식을 신청했다.

서씨는 신청 3일 후 이식 수술을 받았다. 안 보이던 오른쪽 눈이 보이자 서씨는 "당황스러웠다"면서도 "해방감을 느꼈다"고 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10여년 희귀병을 앓다가 세상을 떠난 동갑내기 남학생이 서씨에게 각막을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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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막을 이식받고 5년이 흐른 2015년 서씨가 가족과 여행을 간 모습. 서씨는 6남매 중 첫째다./사진제공=서지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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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식 후 서씨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다고 한다. 평소 서씨가 학업에 열중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1학년 때는 380여명이 다니는 학교에서 321등을 했다. 졸업할 때 서씨 등수는 전교 8등이었다. 서씨는 "귀한 나눔을 해준 친구에게 감사하다"며 "조금 더 잘 살아야겠다는 책임감이 생겼다"고 했다.

서씨는 지역 공무원으로 4~5년 근무하다가 자신만의 문화기획사를 차려서 운영하고 있다. 직원도 한명 딸렸는데 지방자치단체가 추진하는 문화 행사를 발주받아 운영하고 있다. 지금도 서씨는 경상남도 창원시청 발주로 지역 굿즈(상품)를 홍보하는 팝업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서씨는 시력을 회복한 기쁨을 만끽하고 있다. 그는 월드컵 팬이다. 올해 카타르 월드컵 조별 예선 1·2·3차전 경기를 모두 봤다. 2차 전 가나전(戰) 후 서씨는 "졌지만 잘 싸웠다고 생각했는데 일본이 16강에 진출하는 것을 보고 오기가 생기더라"라고 했다. 서씨는 한국 축구대표팀이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3차전 포르투갈 전 생중계를 지인들과 함께 봤다.

서씨는 오는 6일 새벽 4시에 진행되는 16강 브라질 전도 생중계를 볼 계획이다. 그는 "만일 각막 이식을 받지 못했다면 지금쯤 시력을 잃어 경기를 아예 못 볼 수도 있었을 것"이라며 "한국 대표팀이 16강에 진출한 감동을 나는 이식을 해준 그분에게서 느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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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 때 서지원씨 모습. 공무원을 지내다가 지금은 문화 기획사 대표로 지내고 있다./사진제공=서지원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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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는 이미 중학생 때 장기·조직 기증 희망자로 등록을 했다. 그는 기증이 '합리적인 축복'이라고 했다. 서씨는 "기증은 세상을 떠나면 내가 쓰지 않을 장기·조직을 남에게 나누는 합리적인 축복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2017년 한 병원에서 장기기증을 마친 시신 처리를 유족에게 떠넘긴 일이 있었다. 이후 유족 대우는 개선됐지만 장기기증을 향한 여론은 아직 부정적이다. 서씨는 "장기기증으로 생명을 회복한 수많은 사람들이 이 사회에서 많은 역할을 할 수 있을 텐데 그 가능성을 함께 생각해주면 좋겠다"며 "기증으로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일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기증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김성진 기자 zk00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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