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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ESC] 발끝에 손 안 닿아도 요가 할 수 있냐고요? 물론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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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하루운동 요가

근육 툭 끊기는 느낌 들지 않게…

매트 밖에서도 이어 나가야 할

주어진 조건에서 최선 다하는 법


한겨레

파리브르타 자누시르사아사나를 하는 모습. 요가를 할 때 스스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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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가를 한다고 하면 많이 듣는 질문이 있다. 바로 “뻣뻣한 사람도 요가 할 수 있나요?”다. 30대 초반 여성인 친구부터 50대 후반 남성인 회사 동료까지. 정말 많은 이가 “허리를 아래로 숙여도 발끝에 손이 닿지 않는다”면서 자신 같은 사람에게도 요가를 추천하느냐고 내게 묻는다. 내 대답은 항상 “물론이죠”다.

4년 가까이 요가 수련을 하고 있지만 나부터도 두 다리를 쭉 펴고 앉은 채 허리를 깊이 숙여 두 손으로 발바닥을 감싸는 ‘파스치모타나아사나’를 완성하지 못한다. 여기서 ‘완성’이라는 표현을 쓴 건, 같은 자세를 하더라도 발끝에 손이 가 닿는 날도 있지만 그날그날 컨디션에 따라 발목이나 정강이, 심지어는 무릎 언저리에서 손이 머물러야 하는 날도 있기 때문이다. 또 그래도 되는 게 요가다. 내 첫 요가 선생님은 “숨 쉬세요”라는 말 만큼이나 “스스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을 찾아 그곳에서 멈추세요”라는 말을 자주 했다.

매트 밖에선 왜 자꾸만 욕심이 날까


이제 와 되돌아보면 지난 4년간 요가 매트에서 나가떨어지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완벽함에 대한 기대가 없었던 덕분이다. 연재 첫 편에 언급했듯,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체력장 유연성 검사에서 손끝과 발끝 사이가 늘 ‘마이너스 30㎝’가 나올 정도로 뻣뻣했다. 그러다 보니 요가를 잘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가 처음부터 없었다. 지금은 요가를 잘한다는 게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도 조금 달라졌지만, 요가를 시작할 때부터 인스타그램 속 요기니들의 멋진 완성 자세를 탐내지 않았다는 의미다.

기대가 없으니 실망할 일도 크게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의 수련이 쌓여 이전엔 안 되던 자세가 어느 날 완성 자세에 조금이나마 가까워지면 크리스마스 아침에 깜짝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남들보다 한참 뒤에 있으니, “어, 오늘 어제보다 좀 나은데?”하는 작은 성취감도 더 자주 찾아왔다. ‘어차피 직업 요가인이 될 것도 아닌데, 이 정도면 됐다’는 마음에 만족감을 남들보다 쉬이 느낀 것도 사실이다.

매트 밖에선 작은 만족감에 멈추기가 쉽지 않다. 취재할 땐 ‘반나절만 더 있었다면’ 하고 욕심이 나고, 기사를 쓸 땐 ‘30분만 더 붙잡고 있을 수 있다면’ 하고 욕심이 난다. 그러다 지나치면 마감 시간을 넘기는 큰 사고를 치게 된다. 기자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선배 기자들은 “매번 작품을 쓰려고 하면 아무것도 쓸 수가 없다”고 조언했다. 기사에는 늘 마감 시간과 글자 수라는 제약이 있다. 그러니 매번 완벽한 기사를 써내려 무리하기보다, 주어진 제약 조건을 맞추는 한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채용 심사위원으로 자주 들어가는 어느 선배는 “기사가 부실해도 제시간에 써내는 지원자와 완성도 높은 기사이지만 마감을 못 지키는 지원자가 있으면 무조건 전자를 뽑는다”며 (지금도 마감 시간을 넘긴 채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를 뜨끔하게 만들었다.

한겨레

4년 가까이 요가 수련을 해도 내게 너무 어려운 파스치모타나아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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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 위에서 작은 만족감을 느끼는 게 매트 밖에서보다 쉬웠던 건 무리하다간 다칠 수 있겠다는 게 더 예민하게 느껴져서였다. 한쪽 다리는 펴고 다른 쪽 다리는 접은 채 상체를 편 다리 쪽으로 비틀며 숙여 내려가는 ‘파리브르타 자누시르사아사나’를 예로 들어 보자. 상체를 적당히 숙여 내려갈 때는 펴 놓은 쪽 다리 뒤 근육이 찌릿찌릿 기분 좋게 이완된다. 하지만 적당한 수준을 넘어서면 다리 뒤 근육이 이완되다 못해 툭 끊어지는 느낌마저 든다. “백 명의 수련자가 있으면 백 가지의 요가가 있다”는 말이 있듯 사람마다 천차만별이겠지만, 적어도 다리 뒤쪽 근육이 남들보다 짧은 나에겐 조심해서 접근해야 하는 자세 중 하나다. 정말로 ‘스스로 머무를 수 있는 곳’이 어디인지 그날그날 섬세하게 알아채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덕에 매트 위에선 자연스럽게 내려놓는 법과 만족하는 법을 연습하게 된다.

제약이 오히려 장점인 때도 있다. 다른 사람들에게 요가를 안내할 때 그랬다. 지난해 여름 하타요가 지도자 과정을 밟으며 ‘도반’(함께 수련하는 벗이라는 의미) 선생님들을 상대로 시범 수업을 했다. 쩔쩔매며 첫 수업을 마치고 들은 평가는 뜻밖이었다. “초보자도 따라 할 수 있는 쉬운 시퀀스(순서)로 짜여 있어 좋습니다”, “완성 자세로 가기 전 여러 단계의 중간 자세를 안내하고 선택할 수 있도록 한 점이 좋았습니다.”

만족하며 머물기와 포기 사이


만족하며 머무를 줄 아는 것과 안주하거나 포기하는 것 사이 경계선이 모호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날은 선생님의 가벼운 핸즈 온(다른 수련자가 잘못된 자세를 바로잡거나 더 깊은 자극을 느끼도록 몸에 손을 대는 것) 한 번에 도무지 안 될 것 같던 자세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호흡이 변수가 되는 날도 있다. 다칠까 봐 긴장한 채 숨을 참고 있을 때는 안 숙여지던 몸이, 선생님을 따라 깊게 숨을 한 차례 마셨다가 내쉬고 나서는 쑥 내려가는 것이다. ‘요령껏 손을 조금만 더 뻗으면 발을 잡을 수 있는데, 내가 너무 겁을 내는 건 아닐까?’ 내가 이런 고민을 털어놓자 한 선생님은 산신령처럼 말했다. “그 차이는 누구보다 본인이 가장 잘 느낄 수 있을 걸요?”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마감 시간에 쫓겨서이건, ‘에이, 이 정도면 됐지 뭐’하는 안일한 마음이 들어서건, 취재하다가 더 파고들어야 하는 지점에서 멈춰 찜찜하게 기사를 넘겨버리고 말면 누군가는 꼭 알아챘다. 독자가 됐건 데스크가 됐건 그 지점을 콕 짚어 “왜 이 이야기는 자세히 안 썼냐”고 묻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났다. 어디서 멈춰야 하고 어디서 한 뼘 더 뻗어 내려가야 하는지는 언제나 다른 누가 아닌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글·사진 정인선 기자 re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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