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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 (일)

[경제포커스] 주인없는 기업은 정부 맘대로 해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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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지주·KT CEO 뽑는데 정부 개입 갈수록 강해져

株主조차 주인아닌 한국 기업 글로벌 흐름에 크게 뒤처져

신한금융과 우리금융, KT 등 이른바 소유 분산 기업의 CEO(최고경영자) 선출 과정에서 정부의 개입 강도가 갈수록 세지고 있다. 주인 없는 기업 CEO 교체의 신호탄이 됐던 작년 12월 신한금융 회장 선출 때는 연임이 유력하던 현직 회장이 갑작스럽게 사퇴해 ‘보이지 않는 손’ 논란이 일었지만, 정부가 후임 회장 선출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2월 우리금융 사례에서는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현명한 판단을 바란다”며 현직 회장의 사퇴를 압박했을 뿐 아니라, “후보자 쇼트 리스트(short list, 2차 후보 명단)가 결정되는 과정에서 적정한 시간이 확보됐는지 걱정”이라며 후임자 선출에 훈수를 뒀다.

조선일보

KT 차기 CEO로 내정된 후보들이 잇달아 사퇴하면서 KT 경영권 공백이 장기화할 가능성이 커졌다. 사진 왼쪽은 정부와 정치권 압력에 밀려 연임을 포기한 구현모 KT 대표, 오른쪽은 후임 CEO로 내정됐다가 사퇴한 윤경림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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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맥스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KT의 경영진 공백 사태다. 현직 CEO에 이어 후임으로 내정된 후보자가 외압에 밀려 낙마한 데다 사외이사들까지 줄사퇴하면서 전체 이사진 11명 가운데 사외이사 4명만 남게 됐다. 임직원이 5만8000명에 달하는 국내 최대 통신 기업의 이사회가 사실상 공중분해된 것이나 다름없다. 차기 CEO를 뽑는 대표이사후보심사위원회 구성도 하기 힘든 상황이다.

한 경제계 인사는 “주인 없는 기업 CEO의 셀프 연임을 막겠다는 명분으로 전반전에만 뛰기로 했던 정부가 후임을 뽑는 후반전까지 선수로 나선 격”이라며 “정부가 강하게 밀어붙이는 것은 이미 누군가 후임자를 낙점하고 있기 때문 아니겠느냐”고 했다. 주력인 통신 산업뿐 아니라 BC카드와 케이뱅크 등 금융 계열사까지 거느린 KT그룹의 사외이사와 임원 자리는 100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KT 안팎에서 “정부의 과도한 개입은 결국 정권 창출에 기여한 캠프 출신들을 낙하산으로 내려보내기 위한 사전 정지 작업 아니냐”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정부가 의도했건 안 했건 상관없이 KT의 후임 CEO는 친정부 인사로 채워질 가능성이 높다. KT가 당면한 최대 리스크가 바로 정부이기 때문이다. 향후 구성될 이사회는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라도 전문성과 경영 능력보다는 현 정부와 코드가 맞는 인사를 CEO로 내세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KT보다 먼저 정부 리스크를 겪었던 우리금융이 내부 출신 후보를 제치고 박근혜 정부에서 금융위원장을 지낸 임종룡 회장을 선출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흥미진진하지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막장 드라마 같은 이번 사태는 경영계의 최신 글로벌 흐름에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뒤처져 있는지를 새삼 실감케 한다. 미국 대기업 CEO들의 모임인 비즈니스라운드테이블(BRT)은 2019년 8월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가치 선언문을 발표했다. “기업의 존재 목적은 고객 가치 제공, 임직원 투자, 협력 업체와의 공정하고 윤리적인 거래, 지역사회 지원, 환경보호, 장기적인 주주 가치 창출”이라는 내용이다. 기업이 주주만을 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고객, 직원, 납품 업체, 지역사회 등 모든 이해 관계자의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선언문에는 제이미 다이먼(JP모건), 제프 베이조스(아마존), 팀 쿡(애플) 등 181명의 CEO가 서명했다. 자본 시장 전문가인 이관휘 서울대 교수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란 책에서 이 선언문을 인용하며 “주주만이 기업의 주인은 아니라는 흐름이 밀려오는데 한국에선 아직 주주조차 기업의 주인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재정경제부 차관과 청와대 경제수석, 경영자총협회 회장 등 관계와 재계 고위직을 두루 지낸 박병원 안민정책포럼 이사장은 “기업의 지배 구조 개선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정부가 개입하면 더 멀어질 뿐이다”라고 했다. 원로의 고언을 정부가 깊이 새겼으면 한다.

[나지홍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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