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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6 (목)

9년전부터 에너지 독립 나섰다... 小國 리투아니아가 러와 맞선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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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0만 소국 리투아니아 에너지 독립 현장 르포

조선일보

북유럽 발트해에 면한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항구에 ‘초대형 해상 액화천연가스(LNG) 기지’로 불리는 인디펜던스호가 정박해 있다. LNG를 저장한 뒤 필요할 때 꺼내 쓸 수 있는 곳으로,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 정책에 당당히 맞설 수 있는 버팀목이다. 인디펜던스호 공동 최고책임자는 “러시아에서 에너지 독립을 이루겠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고 했다./AB Klaipedos Naf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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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6일(현지 시각) 북유럽 발트해에 면한 리투아니아의 항구 도시 클라이페다(Klaipeda). 수도 빌뉴스에서 북서쪽으로 280여㎞ 떨어진 이곳에 ‘바다에 떠있는 액화천연가스(LNG) 기지’로 불리는 초대형 선박이 정박하고 있었다. 길이 294m, 너비 46m, 높이 26m로, 여의도 63빌딩(249m)을 눕혀놓은 것보다 덩치가 컸다. 뱃머리엔 ‘인디펜던스(Independence·독립)’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프란코 마티자섹 인디펜던스호 공동 최고책임자는 “러시아에서 에너지 독립을 이루겠다는 뜻으로 붙인 이름”이라며 “인디펜던스호 덕분에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의 에너지 무기화 전략에도 당당히 버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리투아니아는 1990년 구(舊)소련 국가 중 처음 독립을 선포한 나라다. 인구 280만명 소국(小國)이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두 달 만인 지난해 4월 유럽연합(EU) 회원국 중 가장 먼저 러시아산 석유 수입을 중단했다. 이어 전력과 천연가스 등 기타 러시아산 에너지 수입도 끊었다. 러시아에 에너지 수입을 많이 의존한 독일 등 전통적인 유럽 강대국들이 머뭇거린 것과 대조되는 행보였다. 리투아니아는 대러 외교에서도 초강수를 던졌다. 자국 주재 러시아 대사를 본국으로 추방했고, 러시아와 맺은 외교 관계를 격하했다. EU가 추진한 대러 제재에서도 선봉에 섰다. 이 작은 나라가 어떻게 러시아에 가장 당당할 수 있었을까.

리투아니아 에너지부 알비나스 자나나비치우스 차관은 “구소련에서 떨어져나오고 나서 정말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다”고 했다. 러시아는 구소련 해체 후 에너지 공급을 끊겠다고 협박하는 전략으로 독립국들을 통제하려 했다. 그는 “독립 직후 러시아가 에너지를 때때로 차단해 열 공급이 중단되고, 수도가 끊기며, 교통이 마비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다”며 “일부 국가는 이런 러시아에 굴복해 친러가 됐지만, 우리는 이렇게 계속 속국처럼 살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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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에 일찌감치 가입하고 서방국과 가까이 지내던 리투아니아가 눈엣가시였던 러시아의 국영 석유 회사 가스프롬은 10여 년 전까지도 독일에 공급한 천연가스보다 30~40% 높은 가격을 리투아니아에 적용했다. 다른 에너지 공급원을 확보할 수 없었던 리투아니아는 울며 겨자 먹기로 비싼 값을 지불해야 했다. 러시아 국영 언론은 리투아니아를 두고 “에너지 부족의 운명에 처한 죽어가는 젊은 민주주의”라고 비아냥거렸다. 리투아니아는 하지만 러시아에 순응하는 대신 본격적인 에너지 독립에 착수했다.

에너지 독립을 주도한 인물은 2009~2019년 집권하며 ‘발트해 철의 여인’으로 불린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전 리투아니아 대통령이었다. 취임 직후부터 러시아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한 계획에 착수했고, 5년 후인 2014년 현대중공업이 건조한 선박이 완성됐다. LNG를 수입해 오래 저장해놓을 수 있는 LNG 저장·가공 선박 인디펜던스호였다. 리투아니아가 다른 나라로부터 에너지를 본격적으로 수입할 조짐을 보여 ‘독점’이 어려워지자, 러시아는 그제야 리투아니아에 대한 천연가스 판매가를 다른 국가와 같은 수준으로 낮췄다. 2014년 100㎏당 48유로였던 러시아산 천연가스 가격이 이듬해 26유로로 내려갔다.

2015년 상업 운영을 시작한 인디펜던스호는 선박에 장착한 탱크 4곳에 LNG를 최대 7만t까지 저장해둘 수 있다. 평소에는 연안에 정박해 LNG선이 운반해 온 천연가스를 액화시켜 저장하고, 수요가 생기면 다시 천연가스로 바꿔 파이프라인을 통해 육지로 보낸다.

◇'해상 LNG 기지’로 에너지 독립 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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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7일(현지 시각)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항구에 있는 인디펜던스호 선상에서 공동 최고책임자 프란코 마티자섹이 인디펜던스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김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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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펜던스호는 리투아니아 국영 에너지 기업 KN이 운영하고 있다. 주리타 실린스카이테 벤스로비네 KN 상업 책임자는 “우크라이나 전쟁 전에는 6~7개 기업이 LNG 터미널을 이용했는데, 지금은 16개 기업이 사용하고 있다”며 “초기에는 이용 용량의 50% 정도를 사용했지만, 우크라이나 전쟁 후 수요가 늘어 지금은 80~100% 수준으로 풀가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폴란드 국영 가스 회사 PGNiG 등 이웃 나라의 기업도 돈을 내고 인디펜던스호를 빌려 쓴다. 이 기업들은 미국, 노르웨이, 이집트 등 세계 각국에서 LNG를 수입한 뒤 이곳에 저장해 둔다. 프란코 마티자섹 인디펜던스호 공동 최고책임자는 “7~8일에 한 번씩 크고 작은 LNG 수송선이 와서 가스를 저장하거나 받아간다”고 설명했다.

이날 둘러본 인디펜던스호 곳곳에는 그리바우스카이테 전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었다. 자나나비치우스 에너지부 차관은 “러시아의 에너지 공급 중단 조치가 우리를 일깨우는 계기(wake-up call)가 됐다”며 “인디펜던스호를 추진하던 초기만 해도 많은 사람이 ‘미친 생각(crazy idea)’ ‘차라리 러시아에 협력하라’고 했지만, 뚝심으로 밀어붙여 지금은 리투아니아 에너지 독립의 핵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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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5월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 인근 자우니우나이에서 열린 폴란드~리투아니아 파이프라인(GIPL) 개통식에서 기타나스 나우세다(가운데) 리투아니아 대통령과 안제이 두다(오른쪽) 폴란드 대통령, 에길스 레비츠 라트비아 대통령이 손뼉을 치고 있다. /AP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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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너지 공급망 다변화도 추진

리투아니아가 인디펜던스호 하나만으로 러시아에 맞선 것은 아니다.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잇는 파이프라인(GIPL)은 2020년 1월 착공해 지난해 5월 상업 운영에 돌입했다. 508㎞에 달하는 GIPL을 통해 한 해 천연가스 약 20억㎥가 양국으로 이송된다. GIPL은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핀란드를 잇는 기존 가스관과 연결돼 리투아니아의 유럽 천연가스 네트워크 접근성을 대폭 확장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리투아니아와 스웨덴을 잇는 해저 전력 케이블(NordBalt)도 2021년 상업 운영을 시작했다. 이를 통해 리투아니아는 스웨덴을 포함한 인근 국가에서 전력을 수입할 수 있게 됐다.

지난 13일 수도 빌뉴스에서 만난 마리우스 스쿠오디스 운송통신부 장관은 “자연재해나 테러, 전쟁 등 예상치 못한 상황이 언제든 발생할 수 있어 에너지 공급을 한 국가나 기업에 전적으로 의존하기엔 위험이 너무 크다”며 “2030년까지 유럽 대륙과 연결된 전력망을 추가로 건설해 EU와의 전력망 동기화에도 속도를 내겠다”고 말했다. 다음 달 17일 한국을 방문하는 스쿠오디스 장관은 “클라이페다 항구와 부산항 간 다양한 협력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말했다.

◇신재생에너지 2050년까지 80%로

리투아니아는 신재생에너지를 확대해 에너지 패러다임을 바꿔 화석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는 전략도 추진하고 있다. ‘국가 에너지 독립’ 전략을 채택, 총 에너지 소비량에서 신재생에너지 비율을 2030년까지 45%, 2050년까지 80%로 늘리는 것을 목표로 세웠다. 리투아니아의 신재생에너지 비율은 2009년 20%에서 2019년 34%까지 높아졌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클라이페다에 해상 풍력발전 시설 건설도 추진하고 있다. 자나나비치우스 에너지부 차관은 “발트해는 수심이 비교적 얕고 바람도 많이 불어 풍력발전기를 설치하기 적합한 환경”이라고 했다.

[김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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