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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이슈 미술의 세계

유쾌하게 신랄하게…'비주류의 설움'을 꼬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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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차이에서 배워라 해나 개즈비 지음, 노지양 옮김 창비 펴냄, 2만3000원


이 시대 최고의 이야기꾼, 호주 출신 스탠드업 코미디언 해나 개즈비의 자서전이 번역돼 나왔다.

때는 2018년, 개즈비는 더 이상 사람들을 웃기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 이후 세계적 스타로 거듭났다.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는 그의 코미디쇼 '나의 이야기'(원제 나네트)를 통해서다. 미투 운동이 한창일 때 공개된 이 쇼는 폭발적인 조회 수를 기록하며 미국 순회 공연이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에미상·피보디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후속작인 '나의 더글러스' 역시 넷플릭스에서 볼 수 있으며, 차기작 '보디 오브 워크'도 공개를 앞두고 있다.

물론 나네트 쇼는 은퇴 선언은 아니었다. 주류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누군가를 깎아내리는 해로운 농담을 하지 않겠다는 성찰이자 "부서진 자신을 재건한 여성보다 더 강한 것은 없다"는 외침이었다. 그는 호주 출신, 여성, 레즈비언, 자폐, 경제적 취약성 등 자신을 소수자로 정의한다. 호주 변방의 보수적인 섬 태즈메이니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영향 등으로 이런 정체성은 '다름'이 아닌 '자기혐오'로 내면화됐다. 자기 비하의 늪에 빠졌던 그는 "이미 비주류인 사람에게 자기 비하는 겸손이 아닌 굴욕"이라는 걸 깨닫고 새로운 코미디를 시도한다.

기존의 농담식 코미디쇼와 나네트는 문법이 다르다. 개즈비는 웃음 너머에 가려져 있던 폭력의 트라우마를 분노와 공포심과 함께 꺼내 보였다. 폭력을 행해온 백인 남성들의 권위와 명성 따위는 중요치 않다고도 꼬집었다. 대학에서 예술사를 전공한 지식을 바탕으로 위대한 미술가로 칭송받는 파블로 피카소의 비도덕적, 여성 혐오적 면모를 까발리는 대목도 있다.

쇼는 논란을 일으켰다. 연대와 지지만큼이나 반대 쪽에선 코미디 쇼가 아니라 강연 같다는 식의 비판, 남성 혐오적이라는 비난이 이어졌다. 이 책은 그런 '안티 나네트' 목소리에 대해 개즈비가 답하는 신랄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반박으로 시작한다. 이어 나네트 무대를 완성하기까지의 인생 여정을 들려준다. 총 10개 장에 담긴 그의 일대기로, 원제도 '나네트를 향한 열 걸음(Ten Steps to Nanette)'이다.

분명 가볍지 않은 메시지가 내포돼 있지만, 숙련된 코미디언 개즈비는 짜임새 있는 필력으로 독자를 쉼 없이 웃긴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이렇게나 재밌게 풀어낼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사회적 약자나 성소수자를 웃음거리로 삼지 않으면서도 섬세한 묘사와 허를 찌르는 재치로 웃음 짓게 만드는 코미디 기술이 책 안에서 살아 날뛴다.

또 직접 겪은 트라우마와 우울증, 성인 ADHD(주의력 결핍 및 과잉 행동 장애)와 자폐 진단 등 진솔한 경험은 독자에겐 그 자체로 강력한 위로로 기능한다. 책장을 넘길수록 어떻게 개즈비가 자신을 소수자로 인정하면서도 자아를 그 틀 안에 가두지 않고 재건해냈는지, 왜 개즈비가 누군가에겐 존재 자체로 감사한 대상이 됐는지 공감하게 될 것이다.

[정주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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