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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0 (토)

'구중궁궐' 용산의 앙상한 외교 암투? 차라리 블랙핑크 때문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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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설마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4월 방미를 한달 앞두고 대통령실 서열 3위, 한미 정상회담 총괄역이자 백악관 NSC 보좌관의 카운터 파트를 날려버린 결정적 이유가 미국 대통령 부부가 제안한 블랙핑크와 레이디가가 공연 행사의 7차례 '보고 누락'이라는 보도가 나왔다. 

보수언론이 집중 보도한 이 기사들이 이틀간 용산 주변과 여의도를 휩쓸고 지나갔는데, 대통령실은 31일에야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공연은 대통령의 방미 행사 일정에 없다"고 공지했다. 블랙핑크-레이디가가 공연이 방미 행사에 없다는 것일 뿐, 김성한 전 실장이 경질된 이유가 이 공연을 7차례나 보고 누락했다는 것이란 보도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다.

먼저 김성한 전 실장에 대한 변명을 해야겠다. 반도체지원법과 인플레이션감축법 문제, 북핵 문제, 우크라이나 문제 등 대미 외교에서 핵심 국가 안보와 이익이 걸려 있는 현안을 다뤄 온 그에게 블랙핑크, 레이디가가 문화행사는 후순위의 문제가 맞다. 정무적으로 의미있는 문화행사가 중요치 않다는 게 아니고, 안보실이 직접 챙길 필요가 없는 수준의 일이었다. 미국의 질 바이든 영부인이 참여해 제안한 행사라기에 더더욱 그렇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안보실장이 경질됐다. 공교롭게도 질 바이든 영부인의 카운터 파트는 김건희 영부인이다. 사정이 이러니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이 '블랙핑크, 레이디가가 공연 보고 누락'은 이 사태의 본질이 아니라고 말한다. 용산 대통령실 내부의 '외교라인' 사이의 알력다툼이 본질이라고 한다. 틀렸다. 이 사태의 본질은 '블랙핑크, 레이디가가 공연 보고 누락'이다. 아니 그래야만 한다.    

이 정부가 출범한 후 외교를 대하는 방식엔 일관된 게 있다. 말의 성찬과 분칠이다. 해외에서 단 한번도 '설화'를 달지 않고 들어 온 적이 없었다. 일본 방문은 오므라이스나 소맥, 화과자 만들기가 친교의 상징으로 언론 지면을 뒤덮었고, 11월엔 캄보디아의 한 아이가 영부인과 찍은 사진 때문에 '파버티 폰(Poverty Porn)' 논란이 일었다. 나토 정상회의 때엔 화보 같은 '대통령 부부 B컷 사진'을 공개했다가 역풍을 맞았고 중동에 가선 '이란은 적' 발언으로 논란을 자초했다. 압권은 지난해 9월의 '바이든 날리면' 사건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간신히 48초간 정상 회담(?)을 한 후 이동하며 박진 외교부장관과 김성한 당시 안보실장 쪽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을 한다.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은 쪽팔려서 어떡하나?"

한국 언론 자유의 척도는 바이든을 바이든이라고 말할 수 있는 데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오늘날 총체적 외교 참사는 여기에서부터 노정돼 있었다.

지난해 9월 상황을 돌이켜보자. 뉴욕 방문에 앞서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은 대통령 순방 기간에 "한미정상회담과 한일정상회담을 하기로 합의해 놓고 시간을 조율중에 있다"고 발표했다. 한미 정상회담은 한 행사장에서 마주친 48초 환담으로 밝혀졌다. 한일정상회담은 김 차장 발표 뒤에 일본이 "합의한 적 없다"고 일축하며 무산됐다. 김 차장 경질론이 대두됐다. 그런데 뉴욕에서 윤 대통령은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참석하는 행사장이 있는 빌딩을 찾아갔다. 국기도, 취재진도 없이 한일 정상이 비공개로 만났다. 일본은 이걸 '비공식 간담'이라고 불렀다. 대통령실은 이 만남을 두고 "한일 간 갈등이 존재하는 가운데 해결을 위한 첫걸음을 뗐다는 의미가 있다"라고 화려하게 자평했다. 이 첫걸음의 마지막 스텝은 6개월만에 나왔다. 처참한 외교 실패였다. 대통령실은 일본 관료와 일본 언론을 상대로 현재 고군분투 중이다. 국정운영 지지율은 30%를 찍었다.(31일 한국갤럽)

지난 10개월간의 한국 외교 수준이 이 정도였다. 그리고 김성한 국가안보실장의 경질로 시즌1은 마무리됐다. 기승전결이 채워졌다. 나토정상회의(발단)로 시작해 바이든-날리면 사태로 극은 본격화됐고(전개), 한일 정상회담에서 꼭짓점을 찍은 후(절정), 김성한 전 실장의 벼락같은 사퇴(결말)로 끝났다. 시즌 막판까지 이 극은 장르 규정을 불허했다. 

압권은 김성한 전 실장은 사퇴 공지였다. 그는 "1년 전 대통령님으로부터 보직을 제안받았을 때 한미동맹을 복원하고, 한일 관계를 개선하며 한미일 안보협력을 강화하기 위한 토대를 마련한 후 다시 학교로 돌아가겠다고 말씀드린 바 있다"며 "그런 여건이 어느 정도 충족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후 윤 대통령과 밤 10시 가까이 만찬을 하면서 웃는 얼굴로 작별 인사를 했다고 한다.

한미동맹이 언제 해체된 적이 있었는지 과문한 탓에 잘 모르겠는데다, 해체됐다면 그것이 '복원'이 된 것인지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며, 한일 관계 개선은 커녕 국내 여론에 밀려 대통령 지지율이 30%에서 턱걸이를 하고 있는데 대체 무슨 '토대'가 마련됐는지 역시 알 길이 없다. 사표를 낸 지 50분 만에 후임 안보실장, 그것도 미국에서 일하던 사람을 한국에 급작스럽게 데려와 내정하는 사정이 생겼는데, 이를 두고 뭔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고 느낄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아놓고 보면, '권력의 암투'같은 말은 오히려 사치다. 대통령의 50년지기 친구 김성한 전 실장과, 이명박 정부 외교 실패의 상징 김태효 차장의 재기용. 이들 사이에 무슨 '암투'가 있고, 무슨 '노선 경쟁'이 있었겠나.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 '토털 크라이시스'다.  설사 암투가 있었던들, 그 암투와 노선 경쟁이 한국 외교 수준을 한 단계 높여주긴커녕 이미 처참한 수준으로 추락해 있다. 차라리 미안한 말이지만 (블랙핑크 본인들 의사와 전혀 관련이 없는) K팝 스타 블랙핑크 공연 문제가 김 실장 경질의 원인이라고 믿어주는 게 우리 모두의 정신 건강에 이롭다. 

최소한 윤석열 대통령과 '문화기획자' 커리어의 영부인 관심사가 소홀하게 다뤄져 경질의 원인이 됐다는 보도는 개연성이라도 갖추고 있다. 그러나 '권력 암투설'은 구중궁궐의 구린내를 풍겨댄다. 그리하여 다시 용산 시대의 초심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윤석열 대통령은 문재인 전 대통령이 하는 것과 '반대로'를 줄곧 외쳐 왔다. 그 상징이 대통령실을 '구중궁궐' 청와대에서 하이제킹 해 용산 (옛) 국방부 청사로 이전한 일이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직접 지휘봉을 들고 45분간 프리젠테이션을 했다. 그는 "결단하지 않으면 제왕적 대통령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라며 "일단 공간이 의식을 지배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고, "건물 1층에 기자실을 배치해서 언제든지 1층에 가서 여러분들과, 또 여러분들을 통해 국민들과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소통을 하겠다"고 밝혔다. '국민과의 불통' 청와대 구중궁궐을 넘어, '국민과의 소통' 시대로. 용산시대 개막은 2022년 <조선일보>가 선정한 10대 뉴스에 제일 꼭대기를 차지했다.

여기에서 '구중궁궐 청와대'의 반대 테제는 '국민 소통 용산'이다. 그러나 '바이든 날리면' 사건으로 용산 시대의 상징 '도어스테핑'은 사라졌다. 대통령의 '결단' 배경은 일본 신문을 통해 알게 되고, 대국민 소통은 국무위원들 앞에서 한다. 그리고 '소통의 상징' 용산에선 '권력의 암투'가 벌어진다는 소문이 도는데, 용산의 그 어느 누구도 그 내막을 국민에게 공지하지 않는다. 구중궁궐의 전형적 특성이다. 대체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가 없는데, 어떤 흐릿한 징후들만 안개처럼 잔뜩 모여 있는 그 곳.  

6개월 전의 '바이든 날리면' 사건은 용산에 은폐되어 있던 '어떤 것'의 실체를 드러내 주는 '탈은폐' 사건이었다. 이 '맥거핀'이 어떻게 작동했는지, 한일 정상회담의 어지러운 '성과(?)' 논란과 4월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앞두고 대미 정상 외교를 총괄하는 안보실장의 갑작스럽고 당혹스러운 사퇴라는 사실을 마주하면서 느끼고 있다.

이 모든 사소해보이고 잡다해 보이는 어지러운 사건을 다 걷어내고 나면, 남아 있는 건 청와대라는 새 관광 상품과, 용산 구중궁궐이라는 앙상한 몰골 뿐이다. 

용산에 안개가 짙게 끼어 있다. 

프레시안

▲윤석열 대통령이 28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국기에 경례를 하고 있다. 뒷줄 오른쪽은 김성한 국가안보실장.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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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세열 기자(ilys123@press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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