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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 (일)

이슈 '위안부 문제' 끝나지 않은 전쟁

일본군 성노예가 '상업'이라는 '신친일파', 이들 조국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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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2019년 출간된 문제의 책 <반일 종족주의>(미래사)는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 특히 많이 읽혔다. 한때는 '아마존 재팬'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 뒤로도 꾸준히 팔렸다. 구독자의 연령대는 한국과 일본 똑같이 다수가 '60대 이상'이라 한다. 2020년엔 그 후속편인 <반일종족주의와의 투쟁>도 나왔다. 이 책들을 펴낸 출판사는 '대한민국 국민이 꼭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선전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라는 고대병법의 대가 손자의 가르침을 겸허히 받든다면, <반일 종족주의>에서 늘어놓는 괴변과 사실 왜곡, 억지 주장을 격파하기 위해선 (읽어내려 가기가 힘들더라도 인내심을 갖고) 읽어볼 만하다.

<반일 종족주의> 저자들의 사부(師父), 안병직

혹시 독자 분들이 병법가 손자와 같은 마음으로 <반일 종족주의>를 읽어보시려면, 공공도서관에서 빌려 보시길 권한다. 굳이 돈 내고 사볼 것까진 없다는 뜻이다. 고백하자면, 몇 해 전에 <반일 종족주의>를 읽다가 "이런 책을 쓴 자들은 한국인이 맞나? 일본 극우가 쓴 책을 번역한 게 아닐까?"라는 의문이 문득 떠올랐다. 그럴 무렵 어느 선배를 만나 책 얘길 했더니, 늘 웃는 상이던 얼굴을 찌푸리며 대뜸 이렇게 말했다. "그 얘긴 더 이상 하지말자. 내 정신건강을 위해 폐지 재활용함에다 내다버렸어!"

그 선배와는 대학 다닐 때 안병직(1936년생, 전 서울대교수, 경제사)의 경제사 강의를 함께 들었던 인연이 있다. 1970년대와 1980년대 전반기만 해도 안병직은 후진국 또는 개발도상국의 민족경제를 갉아먹는 매판(買辦)자본을 지적하는 등 나름의 비판적 시각으로 학생들의 관심을 끌었다. <전환시대의 논리>를 쓴 리영희(1929-2010, 전 한양대 교수, 신문방송학)가 학생들에게 끼쳤던 묵직한 무게감에는 못 미치겠지만, 안 교수의 영향을 받아 필자를 포함한 여러 학생들이 부전공으로 경제학 과목을 선택할까 고민했을 정도였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이던 1970년대에 '서울대 운동권의 대부'(?)라는 말까지 듣기도 했던 안병직에겐 이런 일화도 전해진다. 1971년 당시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 이영훈(1951년생, 전 서울대교수, 경제사, <반일 종족주의>의 6인 저자 가운데 대표필자, 현 이승만학당 교장)이 박정희 정권의 주요 정책 가운데 하나인 교련(학교군사훈련)을 거부하는 바람에 제적당하자, "노동운동을 해보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당시 안병직은 이영훈 말고도 여러 학생에게 직업적인 노동운동가가 되길 권했다고 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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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년 넘게 일본군의 성노예제를 비판해온 수요집회. 문제의 책 <일제 종족주의>는 수요집회를 열어온 인권운동가들이 ‘직업적 일거리를 잇기 위해’ 위안부 할머니들을 앞세워 시위를 벌여왔다는 막말을 하고 있다. Ⓒ김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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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판적 지식인에서 '신친일'로 전향, 왜?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안병직의 이념노선이 바뀌었다. 뉴라이트재단 이사장과 한나라당 여의도연구소 이사장을 지낸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보수 우파로 돌아섰다. 그 전까지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을 펼치던 안병직의 학문적 입장이 (일제의 식민통치가 근대화에 기여했다는) 식민지근대화론 쪽으로 기울었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는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같은 일이 왜 그에게 일어났을까.

1990년대 초 소련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지식인들의 이념적 지형에 큰 충격이 주어진 것이 1차적으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한때는 일부 사람들에게 '사회주의 모국'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소련의 붕괴와 이에 따른 북한 경제의 어려움을 목격하면서, 이론적 구심점을 잃은 운동권 출신들이 잇따라 보수 우파로 전향하는 흐름이 생겨났다. 안병직의 변신은 그들보다 빠른 1980년대 후반에 시작됐지만, 큰 그림으로 보면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안병직은 1980년대부터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면서, 그곳 우파 지식인들과의 잦은 접촉이 이념적 변신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지금의 안병직은? 이영훈을 비롯한 <반일 종족주의>의 저자들이 사부로 여기는 인물이다. 30~40년 전만 해도 자신이 '21세기 신친일파' 계보에서 꼭지를 차지할 것이란 생각도 못 했을 것이다. <반일 종족주의>의 6인 저자 가운데 핵심인 이영훈(이승만학당 교장), 김낙년(낙성대연구소장), 주익종(이승만학당 교사)도 마찬가지다. 이들이 서울대 경제학과를 다니며 안병직 교수에게 배우던 시절엔 사회변혁을 꿈꾸었던 진보적 청년들이었다.

'신친일파'로 전향한 뒤 안병직이 가끔씩 던진 파문은 지금도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있다. 그는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MBC 뉴스현장 인터뷰(2006년 12월6일)에서 "일제시대 공공연한 토지수탈은 없었다"고 부인하더니, 이어 "위안부를 강제동원했다는 객관적인 자료는 하나도 없다"고 주장해 논란을 불렀다. 많은 연구자들은 안병직의 위 발언이 '학문적 양심을 버린 터무니없는 친일적 주장'이라 여겼다. 같은 보수 우파에 속하는 사람들도 그의 ‘친일적’ 발언에 엄청난 충격을 받고 분노했음은 물론이다.

"극단적 자학사관이자 혐한(嫌韓) 종족주의"

안병직의 제자들도 논란을 부르기는 마찬가지였다. <반일 종족주의>의 6인 저자 가운데 대표필자인 이영훈(이승만학당 교장)은 지난 2004년 9월 MBC 100분 토론에서 "일본군 성노예가 '사실상 상업적 목적을 지닌 공창 형태'였다"고 말했다가 거센 국민적 비난을 받았다. 급기야 나흘 뒤 '나눔의 집' 수련관에 들어서자말자 7명의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무릎 꿇고 큰 절로 사과를 했었다. 할머니들은 끝내 사과를 거부하며, 이영훈에게 이렇게 호통쳤다.

"근본에 문제가 있다. 일본인 아니냐? 당장 호적등본 떼 와라!"(이옥선 할머니),
"학자는 무슨 학자냐? 자격이 없다. 뚫린 입이라고 막말을 하느냐?"(김군자 할머니).

그 자리에서 이영훈은 "할머니들이 일제 강점기 성노예자라는 역사인식에 동의하며 철저한 역사청산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결국 사과하는 모습은 그때뿐이었다. <반일 종족주의>에서 펼쳐진 그의 궤변과 왜곡은 15년 전 그날의 방문과 사과가 국민적 분노를 누그러뜨리고 시간을 벌기 위한 꼼수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여진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이영훈은 주변 사람들에게 그날의 일을 변명하면서 "무릎 꿇으려고 간 것은 아니었는데, 엉겁결에 그렇게 됐다"고 얼버무린다고 한다.

이영훈, 주익종과 함께 서울대 경제학과를 다니며 안병직 교수에게 배웠던 전강수(대구가톨릭대교수, 토지경제학) 같은 이는 <반일 종족주의>의 대표 필자 이영훈에게 매우 비판적이다. 한국을 혐오하고 일본에게 너그러운 '극단적인 자학사관'(自虐史觀)이자, '혐한(嫌韓) 종족주의'에 빠져있다는 것이다. 관련 부문을 줄여 옮겨본다.

[‘반일 종족주의론’은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감히 펼치지 못한 극단적인 자학사관이다. 이영훈은 한국인의 반일 종족주의를 개탄하지만, 실상은 자신이 ‘혐한 종족주의’에 빠져 있다. 혐한 종족주의는 책 전반에 걸쳐 드러난다. 한국 사람의 오류에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눈을 부라리는 반면,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수탈과 악행에는 한없이 관대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그 증거다. 나머지 다섯 명의 필자도 이영훈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는 뜻이겠다.](전강수, <반일 종족주의의 오만과 거짓> 한겨레출판, 2020, 39-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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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군수공장에서 실탄을 제조하고 있는 근로정신대 여성들. Ⓒ썸앤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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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왜곡, 황당한 판결'이라며 한국 대법원 비난

문제의 <반일 종족주의>는 어떤 주장들을 펼치며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드는가. 위에서 썼듯이, 그 책을 읽다가 폐지 재활용함에 던져 버렸다는 선배가 혹시 이 글을 본다면, 혈압이 또 오를 게 뻔하다. 일상에 바쁜 독자들의 시간도 절약할 겸 눈에 띄는 사항만 몇 개 꼽자면, 다음과 같다.

△식민지 조선의 쌀을 ‘수탈’해간 것이나 아니라 ‘대가를 지불하고 수입’해간 것이고 ‘농민의 소득 증가에 오히려 기여’했고(44-51쪽),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인의 토지를 수탈하고 산미증식계획으로 쌀을 수탈해갔다고 가르치는 한국사 교과서가 잘못됐다(53-54쪽).
△일제 강점기 말기의 강제동원은 허구이자 신화이며 따라서 한국의 교과서가 역사를 왜곡한다. 피해자들이 주장하듯 ‘노예노동’은 없었다. 강제동원 피해자에 배상하라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2018년 10월30일)은 ‘명백한 역사왜곡에 근거한 황당한 판결’이다(67-69쪽).
△당시에는 ‘강제연행’이나 ‘강제징용’이란 말조차 없었고, ‘조선인 청년들에게 일본은 하나의 로망’이었다. 징용 조선인들 가운데 도망자가 많았던 것은 ‘근로 조건이 더 좋은 곳으로’의 도망이었다(69쪽). 따라서 한국의 교과서는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71-76쪽).
△1965년 한일협정 때 한국 쪽은 ‘애당초 청구할 게 없었고’ 한일협정으로 일체의 청구권이 완전히 정리되었다(115쪽).
△한국이 독도 영유권을 내세우는 것은 ‘반일 종족주의의 가장 치열한 상징’이다(151쪽).
△조선이 외교권을 박탈당한 1905년 을사조약을 체결한 것은 ‘기회주의자’ 고종(高宗) 임금이다. 이완용을 비롯한 ‘을사 5적’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이 옳지 않다(204-210쪽).
△‘위안부’ 제도는 원래 있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 편성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위안부’들은 ‘고수익’을 챙겼고,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강제연행은 없었다. 위안부 숫자를 과장해선 곤란하다(301-304쪽).
△위안부제를 일본군의 전쟁범죄라는 인식에 동조하지 않는다. 정대협(지금의 정의기억연대)는 직업적 일거리를 잇기 위해 위안부들을 앞세운 시위를 줄기차게도 벌여왔다(337쪽).

"일일이 논박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소모적"

줄인다고 줄인 것이 위와 같이 길다. 위 궤변들 말고도 또 여러 항목들이 있지만, 무시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반일 종족주의>에 대한 한국 주류학계의 분위기를 한마디로 줄이면, "일일이 대응할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강제동원과 관련해 여러 연구 보고서와 책자를 펴내온 정혜경 연구위원(ARGO인문사회연구소)은 그가 공저자로 참여한 책의 소제목을 ‘일일이 논박할 가치가 없으나’로 잡았다. 그 이유를 들어보자.

[(반일 종족주의의) 집필자는 자신이 잘못 알고 있는 내용을 오히려 학계의 역사왜곡이라고 규정하며, 강제동원의 역사를 부정하는 근거로 삼았습니다. 또한 학계나 사회단체가 의도적으로 왜곡을 확산하는 듯이 표현했습니다.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주장만 난무하며, 이미 공개된 다양한 자료를 확인하지 않고 억측과 궤변으로 대신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일일이 논박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소모적입니다.] (정혜경·허광무·조건·이상호, <반反대를 론論하다: 반일종족주의의 역사부정을 넘어> 선인, 2019, 152쪽).

<반일종족주의> 저자들은 일제 강점기 말기의 강제동원 문제에서 독자들을 화나게 만든다. 강제동원은 허구이자 신화이며 따라서 “한국의 교과서가 역사를 왜곡한다”는 궤변을 늘어놓는다. 아울러 많은 피해자들이 한결같이 주장해온 '노예노동'은 없었다고 우긴다. 더구나 강제동원 피해자에 대한 배상을 판결한 한국 대법원의 판결(2018년 10월30일)을 ‘명백한 역사왜곡에 근거한 황당한 판결’이라 조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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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신일본제철 본사 앞에서 강제동원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시위(1998년 6월30일). 오랫동안 일본이 버티는 가운데 올해 3월 한국 정부의 제3자 변제안이 나와 피해 당사자들의 반발을 불렀다.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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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위서'(親日僞書) 필자들, 어느 나라 사람?

특히 이영훈은 '위안부' 강제연행은 없었고. 그 숫자는 3600명쯤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지난 글에서 살펴봤듯이 우리 학계에선 3만~5만 명 사이로 본다. 이영훈은 숫자를 부풀려서 말하면 '곤란하다'고 했다. 누구에게 곤란하다는 말인가? 일본인들에게? 궁금증을 자아내는 표현이다. 그는 '위안부들이 일본군과 함께 죽기를 강요당하기도 했다'며 '위안부'들이 겪었던 참상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전쟁 자체의 참혹함이었다'고 핵심을 비껴간다(304쪽).

그리고는 6.25 한국전쟁 때 있었던 '한국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 그리고 '민간 위안부'란 이름으로 한국사회의 성매매를 필요 이상 길게 언급한다. 정작 논란이 되는 '위안부 성노예'의 핵심이 흐려지기 마련이다. 여기서 또 다시 사람들은 묻게 된다. "도대체 이런 논리를 펴는 자는 어느 나라 사람인가요?” “그렇기에 ‘친일위서’(親日僞書)란 따가운 눈총을 받는 것 아닌가요?”

논리학개론을 읽다보면, "뿔을 둘 다 잡아야,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소머리의 뿔 두 개를 다 잡아야지, 하나만 잡고선 둘 다 잡았다고 우기면 '논리적 오류'에 빠지기 마련이다. <반일 종족주의>를 보면 이른바 실증주의를 내세우면서 필요에 따라선 각종 통계를 근거 자료로 인용함으로써 그들의 주장이 마치 진실인 양 포장돼 있다. 얼핏 보면 그럴싸하다. 하지만 조금만 더 들여다보면, 논리학에서 지적하는 ‘뿔 하나만 잡는 오류’를 밥 먹듯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를테면, 자신들에게 유리한 통계 숫자만 골라내고 다른 각도로 낸 통계를 의도적으로 빠뜨리곤 한다. 통계 숫자뿐 아니다. 서술방식에서도 결론을 정해놓고 거기에 뚜드려 맞추는 억지와 궤변, 왜곡 투성이다.

"길에서 헌병에 붙잡혀 위안부 됐다"는 증언 왜곡

증언자의 녹취록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것만 쏙 빼, 증언자가 말하고자 했던 핵심을 흐리고 엉뚱한 결론으로 왜곡한다. 이를테면, '위안부' 할머니 문옥주(1924-1996)의 경우가 그러하다. "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였다는 김학순 할머니의 최초 증언(1991년 8월14일) 넉달 뒤인 1991년 12월2일 두 번째로 나섰던 문옥주 할머니가 생전에 남긴 증언을 들어보자.

"만 16세가 되는 1940년 가을, 어느 저녁에 친구네 집에서 놀다 집에 돌아가는 데 일본인 군복을 입은 사람이 끌고 갔다. 헌병대 앞이라고 생각했다. 먼저 (잡혀)와 있던 여자도 있었다. 거기 사무실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대구역에서 평복을 입은 일본인 남자와 조선인 남 자에게 넘겨주었다. '아카츠키'라는 기차를 탔다"(여성가족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구술자료 재정리 자료집> 2016년).

<반일 종족주의>의 이영훈은 '문옥주가 헌병에 잡혀갔다고 하지만 그대로 믿어선 곤란하다'면서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고 '어머니나 오빠의 승낙 아래 주선업자에게 끌려간 것을 그렇게 둘러댔을 뿐'이라고 우긴다(321-322쪽). 그러면서 문옥주가 동남아시아에서 '위안부'로 일하면서 가족에게 돈을 보냈다는 점을 내세워 성노예로 착취당한 '위안부‘의 본질을 흩뜨리려 들었다. 합리적으로 생각해보자. 이영훈의 주장대로 가족이 업자에게 팔아넘겼다면, 문옥주가 그런 지옥 같은 삶을 살면서 모은 돈을 어떻게 자신을 성노예로 만든 가족에게 보내려 할 수 있을까.

문옥주가 가족에게 보냈다는 돈의 가치도 거금이 아니었다. 전쟁 중인 동남아 지역에서 하루가 다르게 올라가는 천문학적 인플레에 따른 환율을 고려한다면, 적은 돈이었다. 그럼에도 이영훈은 송금 사실을 들어 문옥주가 성노예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야말로 전형적인 물타기 수법이다. 논리학에 말하는 '뿔'을 하나만 잡고 그럴싸하게 독자들을 현혹시키는 서술 방식이다. 길거리의 야바위꾼들이 행인들의 주머니를 털려고 의도적으로 눈을 혼란시키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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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9월 오전 일본군 위안부 피해 여성 관련 발언으로 논란을 빚고 있는 서울대 경제학부 이영훈 교수가 경기도 광주 '나눔의 집'을 방문, 위안부 피해 할머니의 질타를 듣고 있다. ⓒ연합뉴스



'토착왜구' '부왜노'(附倭奴) '친일 종족주의자'

<반일 종족주의> 출간 이전에도 한바탕 소동이 있었다. 지금부터 10년 전 "위안부는 일본군과는 동지적 관계이자 식민지인으로서 (전쟁)협력자이다" "위안부는 매춘의 틀 안에 있는 여성"이라며 일본 극우파의 입맛에 딱 맞게 쓰인 책이 나와 파문을 일으켰다. 박유하(세종대교수, 일문학)의 <제국의 위안부>(뿌리와이파리, 2013)가 문제의 책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법정 소송 끝에 34곳의 내용이 삭제된 2판이 2015년에 나오긴 했지만, 개운치 못한 여운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그걸로 끝이 아니다. 박유하는 2018년 <제국의 위안부, 지식인을 말한다>와 <제국의 위안부, 법정에서 1460일>을 펴냈다. 국민적 비난에 아랑곳없는 오만한 태도가 인상적이라고 해야 할까.

<제국의 위안부>가 작은 파문이라 친다면, 6년 뒤인 2019년에 나온 <반일 종족주의>는 거센 후폭풍을 낳았다. "구역질난다"는 비난 속에 '토착왜구' '부왜노'(附倭奴)란 돌팔매가 빗발쳤다. "당신들이야말로 친일 종족주의자가 아니고 뭐냐“는 따가운 비판이 쏟아졌다.

침략과 전쟁범죄로 얼룩진 일본의 과거 역사를 부정하기에 ‘역사수정주의자’ 또는 ‘역사부정론자’라는 지적을 받는 (정작 당사자들은 ‘자유주의 사관’을 지녔다고 말하는) 지금의 일본 극우들이 펼치는 억지 주장들과 거의 똑같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호적을 일본으로 파가라"는 비난마저 받는가.

이제 글을 마무리해야 되겠다. 문제의 책 <반일 종족주의>와 그 후속작인 <반일 종족주의와의 투쟁>은 일제의 식민지 통치가 한민족을 노예상태로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근대화에 도움이 됐다는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론'을 펼치고, ‘위안부’가 성노예였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그럼으로써 지난날 전쟁범죄의 기억을 지우고 싶어 하는 일본인들의 어깨를 주물러주며 ‘위안’하고 (아울러 많은 한국인들을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이들 신친일파'는 그들의 '정신적 모국'인 일본에 자주 들락거리면서 챙기는 강연료, 일본어 번역판 인세, 연구지원금 등으로 '생계형 친일'을 하는 것이냐는 의심마저 받는다. 특히 이 책의 논리에 따르면, 독도를 무조건 한국 땅이라 여겨서도 안 된다. 이렇듯 ‘역사전쟁’은 과거사에 머물지 않고 현재진행형이다. 다음 주 글에선 <반일 종족주의>를 중심으로 ‘신친일파’가 펼치는 주장들을 좀 더 들여다볼 참이다. 한국 연구자들의 비판적 저술을 바탕으로, 신친일파의 주장 가운데 특히 무엇이 잘못 됐는지, 그 궤변적 논리의 허구와 문제점을 살펴보려 한다. (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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