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시험 기회를 준다고 하면 끝인가.’ 화가 난 A씨는 싸움을 택했다. 카카오톡 오픈 채팅방에서 피해자를 모았고 변호사의 도움을 받아 공단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A씨는 “계획이 전부 어그러지면서 공부를 위해 아르바이트도 중단해야 할 판”이라며 “정부기관은 자신들의 실수로 개인이 손해를 본 것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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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점도 전에 파쇄된 답안지
한국산업인력공단은 실기시험이 끝나면 답안지를 특수제작한 포대에 봉인해 지사를 거쳐 채점본부로 옮긴다.사진 한국산업인력공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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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이 된 건 지난달 23일 공단 주관으로 치러진 2023년 정기 기사·산업기사 제1회 실기시험이다. 전국 486개 시험장 중 609명이 61개 종목에 대해 시험을 치른 서울 연서중에서 문제가 생겼다. 공단에 따르면 실기시험이 끝나면 답안지는 특수제작한 포대에 봉인돼 지사를 거쳐 채점본부로 옮겨진다. 그러나 인수·인계 중 착오가 생기면서 지난달 23일 서울연서중에서 온 포대 1개가 누락됐다. 서울서부지사가 이 포대를 잔여 문제지로 착각해 파쇄하면서 600여명의 답안지가 채점도 전에 사라지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 같은 사실은 답안지 누락을 인지한 공단이 지난 20일 서울서부지사를 상대로 조사에 나서면서 발생 한 달 만에 세상에 드러났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
공단은 부랴부랴 수습에 나섰다. 피해 수험생들이 다음 달 1~4일, 24~25일 총 6일 중 하루를 택해 희망지역 내 공단 소속기관에서 시험을 볼 수 있게 했다. 응시를 원하지 않으면 응시료를 돌려준다. 해외 체류 등으로 정해진 날짜에 재시험을 치르지 못하는 수험생을 위한 조치도 준비하고 있다. 이번 사태로 피해를 본 수험생 중엔 동남아에서 장기 체류하는 회사원이 있다고 한다. 공단은 해외 주재원을 통해 이 수험생이 시험을 응시할 수 있게 하는 방안 등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
그러나 일부 수험생은 재시험만으론 부족하다고 반발한다. 건축설비기사 시험에 응시한 한모(58)씨는 “왜 시험자가 피해를 떠안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공단 대책은 신속성과 구체성에서 모두 0점이다. 시간 등에 대한 보상이 포함된 대안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건설안전기사 시험에 응시한 김모(26)씨는 “재시험을 치르지 않으면 탈락이라는 건 무책임한 조치다. 추가시험을 응시하면서 잃은 기회비용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 법무법인이 준비하고 있는 ‘연서중 파쇄사건 단체 손해배상소송’엔 25일까지 107명이 동참 의사를 밝혔다고 한다.
공단 내부엔 자조감이 흐르고 있다. 공단 지사의 한 직원은 “답안지를 차량에서 내리면 실기부장한테 넘겨서 바로 금고 안에 넣는데 왜 금고 밖에 방치되었는지 모르겠다”며 “가장 기본적인 게 안 지켜진 것 같다”고 말했다. 이 직원은 “그간 세무사 2차 시험 등 각종 자격검정시험에서 논란이 일면서 직원들이 위축됐는데 이번 건으로 분위기가 더 침울해졌다”라고 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22일부터 공단에 대해 특정감사에 돌입했다. ▶실기시험 답안지 분실 원인 ▶시험관리 시스템상 문제점 ▶시험관리 전반에 대한 관리·감독의 적정성 등을 파악하기 위해 강도 높은 조사를 벌이고 있다. 이 때문에 ‘동요하지 말고 본연의 임무에 집중해달라’는 내부 공지에도 뒤숭숭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고 한 공단 직원은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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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단 조치 비판의견도
어수봉 한국산업인력공단 이사장이 23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2023년도 정기 기사?산업기사 제1회 실기시험 답안지 파쇄사고와 관련해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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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의 공단 게시판엔 공단의 조치를 비판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블라인드 게시판엔 해당 회사나 기관 메일 주소를 인증한 사람만 글을 올릴 수 있다. 한 공단 직원은 “시험은 일주일 남았는데 출제는 2년 분량, 채점은 5일 만에 발표인데 가능할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인사권자인 이사장의 책임이 크다. 인력도 증원하지 못하지 않았나”라는 어수봉 공단 이사장에 대한 한탄도 나왔다. 국민의힘은 지난 23일 “어 이사장이 책임을 지고 사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 이사장은 지난 23일 이번 사태에 대해 사과하면서 “철저히 조사해 잘못된 부분을 확인하고 저를 비롯한 관련 책임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질 것이다”라고 밝혔다.
심석용 기자 shim.seoky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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