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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29 (금)

‘외국인 식모’를 바라는 것인가 [유레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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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김재욱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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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4월부터 1년간 일본 <엔에이치케이>(NHK)가 방영한 <오싱>은 일본 텔레비전 사상 최고 시청률 기록(62.9%)을 남긴 드라마다. 1901년 가난한 소작농의 딸로 태어난 오싱이 1907년 어느 제재소 집안에 쌀 한 가마니에 팔려 ‘식모살이’를 하러 떠나는 것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오싱이 슈퍼마켓 체인점을 일구기까지의 인생 역정은 소설로 옮겨져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판됐다. <한국방송>은 같은 이름의 드라마를 만들어 방영했다.

일본인들은 ‘식모’를 우리나라에도 들여왔다. 강제합병 이후 한반도에 본격 진출한 일본인 가정의 주부들이 가사노동에 한국인 여성을 고용해 쓰기 시작했다. 형편 좋은 한국인 가정도 식모를 고용했는데, 일본어를 해서 일본 가정에 고용되면 급여가 갑절이었다고 한다. 1938년 전체 여성 구직자 2만7014명 가운데 식모 취직자가 2만3527명(87%)에 이를 정도로, 식모는 그 무렵 여성 일자리의 대부분을 차지했다.(정찬일, <삼순이: 식모, 버스안내양, 여공>)

한국전쟁 이후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 때, 도시 가정의 식모 고용이 더욱 빠르게 확산됐다. 가난한 농촌에선 ‘식구’를 줄이려고 딸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어린 나이에 내보냈다. 숙식이 해결되는 식모 자리가 그들을 맞이했다. 1969년 서울 가정의 53%에 식모가 있었다. 당시 30평대의 아파트에는 부엌에 딸린 2평가량의 작은 식모방을 따로 둘 정도였다. 식모는 낮은 보수에다, 모욕과 구타, 때로 성폭력의 피해자가 되기도 했다. 공업화가 진척돼 여성 일자리도 늘어나면서 1970년대 중반부터 식모는 급감했다. 여성인권 향상도 식모를 점차 없앴다. 가사노동자의 명칭도 가정관리원, 가정부, 가사보조원, 가사도우미로 바뀌었다.

외국인 가사노동자 도입 시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지난해 오세훈 서울시장의 도입 제안, 올해 3월 시대전환 조정훈 의원의 최저임금법 적용 배제 법안 발의에 이어,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시범사업 도입 검토 주문이 나왔다. ‘싼 임금’의 매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외국인 식모’를 두자는 것 같다. 모델이 된 싱가포르에선 1978년부터 외국인 가사도우미를 고용하고 있는데, 저출산 대책으로 시작한 게 아니었다. 합계출산율도 올라가지 않았다. 그러나 제도 도입 추진자들은 그것이 유일한 ‘저출생 해결책’이라도 되는 듯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정남구 논설위원 jej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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