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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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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 어머니, 뇌졸중 아버지 모시는 '그들이 사는 세상'…이토록 잔혹한 간병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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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금 100만 원에서 한 달 생활비를 제하면 28만 원이 남았다. 명주는 몇 번이고 다시 계산한 뒤 28만 원에 동그라미를 쳤다. 28만 원은 엄마의 진료비를 내고, 병원 약, 기저귀와 패드, 영양 캔과 속옷 들을 사던 금액이었다. (...)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명주는 엄마가 남겨준 풍요와 여유가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소설『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나무옆의자)은 치매 어머니를 간병하는 50대 여성 명주와 뇌졸중 아버지를 돌보는 20대 청년 준성의 이야기다. 소설은 명주가 연금을 받기 위해 엄마의 사망을 숨기면서 시작된다.

임대아파트 이웃인 명주와 준성은 성별도 세대도 다르지만 빈곤 가정의 부양자이며 친족의 간병인이라는 정체성을 공유한다. "신선하면서도 노련하다는 점에서, 그 밖에 여러 면에서, 군계일학"이라는 심사평과 함께 제19회 세계문학상을 받은 이 소설의 저자 문미순(57)을 서면 인터뷰로 만났다.

중앙일보

장편 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으로 제19회 세계문학상을 받은 문미순 작가. 사진 나무옆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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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빈곤과 간병 문제를 다루는 '사회 소설'의 외피를 가졌지만 시종일관 진지하거나 어둡지만은 않다. 정체불명의 남성이 명주에게 전화해 "당신이 저지른 죄를 알고 있다"는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뚝 끊고, 준성의 부친에게 발생한 사고를 명주가 처리하기로 마음먹은 순간부터 서사는 급물살을 타며 독자에게 진한 서스펜스를 선사한다.

빈곤과 간병이라는 주제 의식도 묵직하지만 무엇보다 뒷얘기가 궁금해진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다. 문미순은 소설, 그중에서도 장편 소설은 무엇보다 재밌어야 한다는 단순하고도 어려운 원칙을 간파한 작가다.

중앙일보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문미순은 "이들이 자신에게 닥친 비극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절박함과 긴박함이 스릴러 같은 분위기를 낸 것 같다"며 "의도한 것은 아니고 다만 장편은 지루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지루한 이야기를 쓰지 않기 위해서 "퇴고하는 과정에서 지루한 장면이나 반복되는 이야기를 추려냈다"고 덧붙였다.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는 게 그가 꼽은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이다.

저자는 47세였던 201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며 소설가가 된 늦깎이다. 등단 후에도 2021년 심훈문학상을 받기 전까지 8년간 마트 아르바이트와 베이비 시터 등 여러 파트타임과 풀타임 직업을 오갔다. 그는 "일과 습작을 병행하느라 첫 장편이 나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사회를 보는 눈을 키운 소중한 시간이 됐다"고 했다.

끓는 물에 장화가 녹아 발에 화상을 입는 급식 노동자 명주, 매달 착실히 납부한 보험료를 회사에 착복 당하는 대리운전 기사 준성 등 살아 숨 쉬는 캐릭터들은 그 "소중한 시간"에서 나왔다. 문미순은 대리기사 커뮤니티를 취재해 그들의 일상을 글자로 세공했다. 화상을 입은 명주의 이야기는 야간 노동자들의 삶을 담은 인터뷰집『달빛 노동 찾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는 "코로나19 시기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간병하며 개인에게 맡겨진 돌봄의 무게를 소설로 다뤄야겠다고 결심했다"고 했다.

저자는 가장 애착이 가는 인물로 "살아갈 날이 많은 청년 준성"을 꼽았다. "준성이 술 취한 아버지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상상으로 아버지를 때려 죽이고, 그 죄책감에 아버지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는 장면을 쓸 때는 준성의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져 상상임에도 마음이 아팠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 제 경험에서 비롯된 소설을 쓴 만큼, 다음번엔 좀 더 상상력을 발휘한 작품을 써보고 싶다"고 했다. 그의 상상력은 다분히 현실을 살아가는 평범한 이들을 향할 것 같다. 세대 갈등, 지방 소멸, 디지털 약자 등이 그가 관심을 갖는 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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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 소설 『우리가 겨울을 지나온 방식』 으로 제19회 세계문학상을 받은 문미순 작가. 사진 나무옆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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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이 어떤 독자들에게는 조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면 더욱 이 소설은 제 기능을 다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부자와 빈자, 모두가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내가 속하지 않은 세계를 한 번쯤 들여다보는 것, 그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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