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어느날, 풍신수길은 한통의 전갈을 받았다. 조선에 상륙한 왜군은 연전연승을 벌이고 있지만, 바다에선 7전 7패를 기록 중이란 내용이었다. '이순신'이란 탁월한 장수가 있음을 알아챈 풍신수길은 몇몇 지휘관에게 특명을 내렸다. "이순신을 죽여라!" 풍신수길은 왕이 아닌 이순신을 '진짜 리더'로 본 모양이다.
풍신수길은 왕이 아닌 이순신을 ‘리더’로 본 듯하다.[사진=게티이미지뱅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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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승전 소식에 의병을 일으키는 사람들의 기세는 한층 높아졌다. 전 만호 김태허金太虛는 전 현감 박홍춘朴弘春, 전 봉사 김응충金應忠과 더불어 울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울산읍을 회복했다.
진사 정세아鄭世雅는 영천에서, 전 봉사 권응수權應銖는 신녕에서 의병을 일으켜 안동 등 여러 고을을 지켜냈다. 전 봉사 신해申海는 하양에서, 전 봉사 최강은 고성에서, 전 출신(문과ㆍ무과ㆍ잡과 등의 시험에 합격한 사람) 제말은 성주에서, 전 현감 여대로呂大老는 금산에서 각각 의기를 들고 일어나 의병을 모집했다.
이른바 '광해군 분조'의 최고령 공직자로 참여했던 전 참판(종2품) 류희림柳希霖도 의병을 일으켜 왜군의 후방을 교란하는 활약을 했다. 임진왜란 전에 충청ㆍ황해ㆍ강원도 등 3도의 관찰사를 역임했던 그는 승지(정3품) 시절 광해군과 더불어 황해도ㆍ평안도 등 각지를 돌아다니며 의병활동을 격려한 바 있다. 선조 때에는 호성3등 공신, 임금 광해에게는 위성2등 공신에 책록됐다.
한림 김륵金玏, 한림 강찬姜燦, 전 참의 김용金湧, 조도사 변이중邊以中도 제각각 의병을 일으켜 기세를 올리며 싸워 나갔다.[※참고: 한림은 예문관의 봉교奉敎(정7품 2인)ㆍ대교待敎(정8품 2인)ㆍ검열檢閱(정9품 4인)을 두루 이르는 말이다. 조도사는 비상시국에 지방에 파견해 군량과 물품을 징발ㆍ수송하는 일을 담당하는 관직이다.]
경상감사 김수는 이각이 성을 버리고 도주한 죄상을 적어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행재소(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에서는 선전관을 보내어 임진강까지 도망을 친 이각을 붙잡아 목을 베어 형을 집행했다. 또한 밀양부사 박진을 승직시켜 경상좌병사를 삼았다.
같은 시기에 경상좌병사 이각도 대포를 발명했는데, 탄환 대신 돌덩이를 사용했다. 하지만 이각은 달아나기 바빠 이 무기를 단 한번도 써보지도 못했다.조선 8도에서 비격진천뢰 같은 무기를 사용했으면 임진왜란의 판도는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경상우도의 의병장으로는 의령의 곽재우, 고령의 김면, 합천의 정인홍鄭仁弘, 성주의 제말, 초계의 이대기李大期 등이 활약했다. 경상좌도에서는 군위에서 장사진張士珍, 경주에서 김호金虎, 예안에서는 김해金垓ㆍ유종개柳宗介 등이 이름을 떨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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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곽재우는 재략이 가장 뛰어났다. 이를 의식했는지 왜군은 소규모 부대로는 의령 서쪽에 접근조차 못 했다. 또한 전 좌랑 김면의 무리는 2000인에 달할 정도로 세력이 컸다. 고령강에서 적병이 탄 배 2척을 습격해 당파하고 적선에 실렸던 물품을 노획했는데, 모두 조선의 궁중 내탕(임금의 사재私財)의 보물이었다.
충청도에선 전 현감 조헌은 홍주에서, 계룡산의 승려 영규靈圭는 승군을 거느리고 용감하게 싸웠다. 충주에서는 조덕공趙德恭 조웅趙雄, 청주淸州에 이봉李逢 등도 의병장이 돼 싸웠다.
경기도에서는 우성전禹性傳, 정숙하鄭淑夏, 수원水原의 최흘崔屹, 고양高陽의 이로李魯, 이산휘李山輝, 남언경南彦經, 김탁金琢, 유대진兪大進, 이질李軼, 홍계남洪季男, 왕옥王玉 등이 의병장으로 일어났다.
구귀가륭은 풍신수길에게 이렇게 답했다. "조선 함대의 강점은 함선이 튼튼하다는 겁니다. 또 무기가 다양하고 함포 사정거리가 길어 상대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순신의 전술 능력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판단됩니다. 하지만 이순신이 거느리는 함대의 2배 병력을 주시면 제가 가서 그의 목을 대령하겠습니다."
풍신수길은 이순신을 잡으려는 욕심에 구귀가륭의 주문대로 함선 70척을 새로 만들어 부산으로 보냈다. 이로써 왜적 수군의 함선은 140여척으로 늘어났다. 이 소식에 잔뜩 겁을 먹은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
풍신수길은 수군의 증파에 그치지 않고 한양성에 머물고 있던 협판안치(와키자카 야스하루)에게 이순신을 죽이라는 특명을 내렸다. 해적 출신 다이묘인 그는 한양을 탈환하려고 모여든 조선의 삼도연합군 5만명을 용인에서 1600여명의 왜군만으로 격퇴한 인물이다.
왜군에 이순신이란 존재는 성가실 수밖에 없었다.[사진=더스쿠프 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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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신수길의 명령에 따라 왜군은 한산대첩 다음날인 1592년 7월 9일 전라도 북단인 금산錦山으로 진입해 제1차 금산전투를 벌였다. 전라도의 대표적인 의병장 전 부사 고경명高敬命이 방어사 곽영과 더불어 이틀이나 싸웠지만 곽영의 관군이 먼저 무너져 달아나 버렸다.
이를 본 고경명은 분노했지만 이날 결국 둘째 아들 고인후高因厚와 함께 전사했다. 고경명의 부하장수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의 군사들 역시 하나도 남지 않고 전사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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