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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한미군 눈∙귀로 보낸 44년…인생 2막 앞둔 그의 롱런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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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영 신체검사에서 두 번의 귀가 조치 후 30살 늦은 나이에 입대했다. 훈련소를 떠나면서 무작위로 카투사에 차출될 때만 해도 주한미군과 인연이 이토록 오래 갈 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판문점을 1000번 이상 오가며 주한미군의 귀와 입으로 보낸 세월이 어느덧 44년이다. 그러는 동안 ‘한미동맹의 산증인’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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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를 일주일 앞둔 25일 주한미군 김영규 공보관이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본지와 인터뷰를 갖은 뒤 촬영에 임하고 있다. 김상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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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한 기회가 ‘천직’으로



오는 31일 퇴임을 앞둔 김영규(76) 주한미군사령부 공보관 이야기다. 지난 2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 만난 그는 “반세기 가까운 기간 매일 긴장감 속에 살았다”며 “여기서 해방된다는 게 아직은 실감이 안 난다”고 말했다.

1976년 입대한 김 공보관은 경기 동두천에 있는 미 2사단 공보실에 배속돼 사단 기관지 ‘인디언 헤드’의 기자로 군 생활을 보냈다. 근무를 시작한 직후 북한군의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터져 일촉즉발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다. 전국 미군 기지 주변을 돌며 혼혈아의 비참한 삶을 조명하는 기사를 써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나름 치열한 군 생활을 보냈다”는 그는 “제대 3개월 전 주한미군으로부터 정식 직원으로 근무해달라는 제안을 받았다”고 했다. 이때만 해도 ‘사회에 복귀할 때 영어 실력만큼은 인정받을 수 있겠거니’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수락했다고 한다.

1985년 주한미군 공보실로 자리를 옮기면서 일을 천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순환 근무로 수시로 바뀌는 동료 미군들 틈에서 긴 시간 일할 수 있었던 마음가짐에 대해 김 공보관은 “‘내가 없으면 안 되겠다’는 책임감 내지 사명감 같은 게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대결·교류·대화 공존하던 판문점…지금은 미완의 장소로 남아



Q : 그는 40년 넘는 기간 동안 판문점을 가장 많이 방문한 한국인으로 꼽힌다.

A : “주한미군사령부, 한미연합사령부, 유엔군사령부 공보관을 겸직하면서 내외신 취재 지원 등을 위해 한때는 일주일에 두 차례 판문점을 방문했던 시기도 있었다. 나에게 판문점의 첫 인상은 ‘대결의 장소’였다.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 정전회담이 열리면 서로 악수도 안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을 계기로 ‘교류의 장소’도 됐다가, 1990년대 남북 대화가 시작되면서 ‘화해의 장소’로서 성격을 더했다.”

대결, 교류, 화해가 공존하던 판문점은 갈 때마다 새로웠다고 그는 회고했다. 남북 관계가 좋을 땐 건너편 북한군과 북쪽 관광객들의 표정에서도 활기가 느껴졌다. 반면 경색됐을 땐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몰라 양쪽 모두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김 공보관은 “지금에 와선 ‘미완의 장소’라는 표현이 적합해 보인다”며 “2018년 남북 정상이 발표한 판문점 선언으로 ‘이제야 이곳에도 봄이 오는구나’ 싶었지만 어정쩡한 상태로 남게 됐다”고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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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31일 은퇴하는주한미군 김영규 공보관. [사진 김영규 공보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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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판문점에서 북한 인사들과 직접 교류도 했나.

A : “북한 매체에선 고위직 기자 2~3명이 오랫동안 판문점 취재를 하더라. 이들과 자주 마주치니 꽤 가까워졌다. 90년대 초 북핵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할 무렵 어떤 북한 기자가 ‘너희들은 경제적으로 앞서있고 강력한 미군도 주둔하고 있지만 우리는 방어할 게 없다’고 핵개발의 정당성을 설명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이에 나는 ‘우리 군사 시스템은 공격이 아니라 방어를 위한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런 면에서 판문점은 역사를 읽는 공간이기도 했다. 시대를 앞선 대화가 오간 셈이다.”



일방 관계에서 협의 관계로…‘효순이 미선이 사건’의 아픔과 교훈



김 공보관은 44년간 가장 힘들었던 일로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의해 숨진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꼽았다. 사건의 여파가 1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많이 지쳤다고 한다.

Q : '효순이 미선이 사건'을 미군은 어떻게 봤나.

A : “꽃다운 여중생 2명이 숨진 데 안타깝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미 2사단 공병대에선 촛불 추모를 열며 진심으로 슬픔을 나누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반미 정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는 가운데 교훈도 적지 않았다. 그는 “주한미군 사이에선 사건이 발생한 도로명을 따 ‘56번 하이웨이(56번 국도)의 교훈’이라는 말이 생겼다”며 “주한미군이 스스로 인식을 바꾸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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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 31일 은퇴하는주한미군 김영규 공보관. [사진 김영규 공보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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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효순이 미선이 사건 이후 무엇이 바뀌었나.

“한·미 관계를 일방의 관계에서 협의의 관계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인식이 미군 내에 퍼졌다. ‘좋은 이웃(good neighbors)’ 프로그램 등을 통해 한국 사회에 다가가려는 노력도 이때 시작됐다. 공보 업무에서도 공조가 활발해졌다. 국방부 대변인실을 자주 찾아 수시로 소통하곤 했다.”



“공부가 재미로, 재미가 열정으로 이어져야”



김 공보관은 최근 한·미 동맹을 놓고선 진정한 동반자적 관계로 나아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최근 한·미 연합훈련을 지켜보니 조율 단계부터 양국이 서로의 요구를 이해하고 미흡한 부분을 채워가는 게 인상적이었다”는 것이다.

유엔사의 역할 강화도 한·미 관계의 긍정적인 신호로 해석했다. 그는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이후 미군이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엔사를 활용한다는 시각에 동의할 수 없다”며 “유엔사의 역할 강화는 유사시 한·미 연합사에 전력 지원을 효율적으로 하는 데 집중돼 있다”고 강조했다.

Q :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나.

A : “오랜 기간 일할 수 있던 비결은 간단하다. ‘열정’을 품으면 된다. 그런데 열정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재미를 느껴야 하고, 재미를 느끼려면 많이 알아야 한다. 나 역시 지난 44년간 끊임없이 공부했다. 심지어 운동권 반미 논리도 이해하려고 운동권 학생들 못지않게 관련 책을 읽었다. 누구보다 잘 설명하고 잘 설득하기 위해선 그렇게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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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경기도 평택시 서부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2023년 한미동맹 콘서트’에서 김영규 공보관이 안병석 한미연합사 부사령관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고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한미연합사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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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공보관은 퇴임 후 방송 일로 인생 2막을 열어갈 계획이다. 주한미군 밖에서 한·미 동맹에 기여할 수 있는 일을 찾는 작업도 계속할 생각이라는 그는 “여전히 배워야 할 게 많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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