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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8 (목)

이슈 끊이지 않는 학교 폭력

[가만한 당신] 홈리스를 연민하고 기피하는 '당신'들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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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리 이어우드 Lori T. Yearwood(1965.9.22~ 2023.9.17)
한국일보

로리 이어우드는 기자 출신 노숙자였고, 노숙자 출신 저널리스트였다. 그는 홈리스 시절의 경험과 통찰로 그들에 대한 사회적 낙인의 부당함을, 홈리스들이 내면화하는 수치와 굴욕, 자기 모멸의 비경제적 고통을 세상에 알렸다. 그는 홈리스들을 연민하고 도우면서, 동정받을 자격을 끊임없이 묻고 따지는 진보-자유주의자들의 위선과 폭력을 특히 신랄하게 비판했다. journeyofhopeuta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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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리스(Homeless)’란 말이 널리 쓰인 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 마크 스턴(Mark Stern)에 따르면, 1980년 초부터다. 중세에도, 산업혁명기 영국에도, 그 전에도 집 없는 이들은 있었다. 대공황 이후 세상을 떠돌며 빌어먹다시피 하던 이들을 미국인들은 ‘호보스(Hobos, 떠돌이)’나 ‘트램프스(Tramps, 부랑자)’라 불렀다. 그들은 원튼 원치 않든 공동체의 일원이었다. 그들이 홈리스와 다른 건, 아니 그들이 다르게 여겨지는 건, 삶의 양태가 달라서가 아니라 그들에 대한 사회의 인식이 달라졌기 때문이란 게 스턴 교수의 주장이다.

1979년 뉴욕의 노숙자들을 대상으로 한 미국 최초 집단소송(Callahan v. Carey)이 하나의 단초가 됐다. 뉴욕카운티 대법원은 홈리스 쉼터 제공의 의무를 시당국과 주정부가 져야 한다고 판결했다. 언론들이 ‘홈리스’를 하나의 범주로 묶어 ‘홈리스 문제’에 주목한 것도 저 무렵부터였다. 존재 양식의 일면을 부각해 특별한 인식 안에 가두는 경향. 세상을 떠돌다가도 일자리가 있으면 잠시 머물며 노동도 하던 호보스들과 달리 ‘홈리스’가 된 그들은 연민이나 기피의 대상, 관리의 대상이 됐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과 낙인을 내면화한다.

사실 가난의 다양한 사연과 양상을 홈리스라는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개념 안에 가둔 건 1980년대 레이건 행정부의 ‘레이거노믹스’뿐 아니라 신자유주의를 비난해온 진보 좌파 진영의 이데올로기였다. UCLA 로스쿨 교수 루시 화이트(Lucie White)는 “홈리스란 존재가 제공하는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는 이미지는 (진보 진영에게)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효과적이었다”며 이후 사회는 전통적인 ‘빈곤층’과 구분되는 “뚜렷한 병리와 특별한 필요를 지닌 새로운 종의 사람들을 수동적 희생자 이미지와 더불어 만들어냈다"고 썼다.

미국의 주거 문제와 홈리스 실태를 고발한 논픽션 ‘쫓겨난 사람들(Evicted)’로 2017년 퓰리처상을 탄 프린스턴대 사회학자 매슈 데즈먼드(Matthew Desmond)는 연초 출간한 ‘미국이 만든 가난(Poverty, by America)’이란 책에서 좌파 지식인과 자유주의자들이 가난을 양산-방치하고 심지어 착취하는 주범으로 지목해온 신자유주의와 자본가의 탐욕은 진실의 전모를 가리는 일종의 착시일 뿐이라고 분석했다.

데즈먼드는 레이건이 집권 8년간 부자들의 세금을 내리고 빈곤층 주택예산을 삭감한 건 사실이지만 빈곤 퇴치를 위한 복지예산 총액은 오히려 늘렸다는 점, 빈곤선 이하 시민 비율은 민주당 집권기에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는 거대자본의 노동 착취뿐 아니라 중산층의 일상적 착취. 즉 건물주의 집세 착취와 금융 대출 및 이자율 착취, 소비자들의 시장 착취가 가난 착취의 주범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기업은 노동자를 착취하지만 근로 빈곤층이 생산하는 값싼 상품과 서비스를 구매하는 소비자도, 그 기업에 투자해 이익을 얻는 우리도 그들을 착취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주택 소유자들이 집값을 비싸게 만들려는 집단적 노력도 착취의 한 형태다. 은행-대출업계는 금융 착취로 가난한 이들의 집을 빼앗고 고율 이자를 부과하지만 그 덕에 우리는 초과 대출을 받고 이자와 수수료 혜택을 누린다.”
데즈먼드는 “가난은 단지 돈이 없다는 것만 의미하지 않는다. 선택의 기회와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썼다. 아무리 임금이 적어도 일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아무리 임대료가 터무니없어도 더 싼 곳이 없어서 집을 빌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 훨씬 불리한 조건이란 걸 알면서도 돈을 빌려야 하는 사람들…. 중산층은 그들 덕에, 다시 말해 그들을 착취하는 시스템 덕에 각자의 경제적 지위를 유지하고 재산을 불릴 수 있다는 것. 데즈먼드는 “배제가 존재하는 곳에는 늘 착취가 존재한다”고, 국가도 절대다수의 시민도, 가난을 아예 없앨 수도 없겠지만 그걸 바라지도 않는다고, 주택 바우처 등 빈민 복지는 결과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는 중산층의 배만 불릴 뿐, 가난(한 이들)이 아예 사라지지 않게 해주는 ‘신장 투석’ 같은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저 거대한 착취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윤리이자 이데올로기가 ‘아메리칸 드림’이다. 사회심리학자 테리 쿠퍼스(Terry Kupers)의 말처럼 “충분한 재능을 지니고 열심히 살면 누구든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아메리칸 드림’의 이면에는 만일 당신이 이룬 바가 미흡하다면 비난받을 사람은 당신 자신일 뿐”이라는 질책이 있기 때문이다.

로리 이어우드(Lori T. Yearwood, 1965.9.22~ 2023.9.17)는 저널리스트 출신 홈리스이자 홈리스 출신 저널리스트였다. 그는 촉망받는 기자였다가 거짓말 같은 잇단 불운에 휩쓸려 노숙자가 됐고, 그 늪에서 2년여 만에 기적적으로 헤어나와 다시 저널리스트로서 어느 가난학자의 담론보다 깊은 통찰과 울림으로 사회와 홈리스의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가 다시 일어선 지 불과 6년 만에 난소암으로 별세했다. 향년 5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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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우드는 동물들, 특히 말을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생명체라 여겼다. 오리건주 작은 목장에서 자기 자신의 말들과 함께 지내던 시절의 이어우드. 2006년 말 간식회사를 차렸다가 2008년 금융위기 등으로 시련을 겪은 그는 X(트위터, @horsetreatlady) 프로필에 세계 최초 말 저탄수/저당 간식회사 설립자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journeyofhopeutah.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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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우드는 1940년대 파나마 이민자의 외동딸로 콜로라도 덴버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 팔로 알토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는 미 항공우주국(NASA) 에임스(Ames)연구센터 소속 미생물학자였고 어머니는 스탠퍼드대 교직원 등을 지낸 워킹맘이었다. 10세 생일 선물로 그랜드피아노를 받았고 12세 무렵부터 발레학교에 다녔다는 이어우드는 91년 샌프란시스코주립대(저널리즘)를 우등 졸업, 마이애미 헤럴드(1993~2000) 등 여러 신문사에서 약 10년간 기자로 일한 뒤 2000년 스스로 퇴사했다. 신경제(인터넷) 버블이 꺼지며 언론사들이 힘들어하던 무렵이었다. 그해 아버지가 별세했고, 그는 상당한 유산을 물려받았다.

그는 마이애미 저소득층 지역 '리버티 시티’의 어린이들을 위한 비영리 글쓰기 교실을 열었다. 아이들이 100명 넘게 찾아왔지만 시와 주정부 보조금으로는 비용과 교사 급여를 댈 수 없었다고 한다. 지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동물들 특히 말들과 함께 살자는 꿈을 좇아 2002년 오리건주 남부의 작은 목장(약 12㎢)을 구입해 이주했다. 아라바이산 말 한 쌍과 개 한 쌍, 고양이 세 마리를 식구로 들였다. 가진 돈으로 검소하게 생활하며 책을 쓰거나 프리랜스 기자로 일하면 그럭저럭 살 수 있으리라 여겼다.
2006년, 수컷 말이 고당(高糖) 간식을 먹고 죽을 뻔한 일을 겪고 나서 그는 건강한 가축 간식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대출까지 받아 벌인 사업은 마음같지 않았고 2008년 금융위기로 고금리에 대출금 상환 압박이 시작됐다. 담보로 잡힌 농장은 결국 은행에 넘어갔고 그는 '식구들'과 함께 어머니 집에 딸린 작업장으로 거처를 옮겨야 했다. 이후로도 그는 “거의 하루도 쉬지 않고” 사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조금씩 여건이 나아져가던 2013년 말, 한 단골 고객이 자기 농장 일부를 썩 좋은 조건으로 그에게 임대했다. 그는 "나도 나지만 말들을 위해" 그해 크리스마스에 이사를 했다. 그리고 불과 2주 뒤 원인 모를 화재로 모든 것을 잃었다.
잇따라 어머니가 말기암 판정을 받고 6개월 만에 별세했고, 반려견 비글이 암 판정을 받았고, 어머니 유산을 둘러싼 친척들과의 극심한 불화까지 시작됐다고 한다. 당시 그는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다고, 잇단 충격으로 인한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상태였다고, 훗날 의사의 진단을 빌어 말했다. 반려견을 묻고, 1년여 밀린 임대료 대신 말들을 넘겨주고,, 그는 달랑 가방 하나 들고 농장을 떠났다. 한동안 지인들의 집을 떠돌며 얹혀 살았고, 싼 호텔에 머물다 방값을 못내 경찰에 의해 솔트레이크시티의 ‘로드하우스(The Road House)’라는 노숙자 쉼터에 수용됐다. 2014년 11월 18일. 직장을 그만둔 지 만 14년, 화재로 재산을 잃은 지 18개월 만이었다. 그는 2021년 에세이에 “저 모든 과정이 마치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듯 느껴졌다”고 썼다.

그날부터 2017년 5월 어느 날 솔트레이크 다운타운의 한 공원 벤치에서 문득 일어서던 날까지 약 2년 반 동안 그는 홈리스로 살았다. 시설에서 442일, 구치소-교도소와 정신병원에서 보낸 날도 260일이었다.

입소 직후, 장갑 한 켤레의 '선의'로 접근한 한 자원봉사자의 상습 폭행과 성폭행은 근 1년간 지속됐고 홈리스 남성들과 경찰관 등의 유무형의 학대와 성추행도 거의 일상이었다. 게다가 쉼터의 열악한 위생 등 환경…. 2018년 워싱턴포스트 에세이에 그는 “시설에서 나는 거의 잠을 못 잤고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고 썼다. 탐폰과 화장실 휴지가 널려 있는 샤워장, 바늘과 주사기들이 예사로 버려져 있는 화장실 복도…. “샤워장 비누 선반에 묻은 배설물을 본 날 밤, 나는 쉼터를 나와 근처 공원 벤치에서 잠을 잤다.(...) 나는 노숙자 쉼터를 일종의 피난처라 알고 살아왔다. 하지만 거긴 거리의 혼돈, 똑같은 절망과 폭력이 압축돼 있는 곳이었다.”
공원(Memory Grove Park) 벤치와 건물 처마 아래에서 노숙하며 그는 공원을 가로지르는 개울에서 주로 세수를 했고, 사람이 없을 땐 몸을 씻기도 했다. 그러다 2016년 9월, 그는 ‘공공음란 행위’로 체포돼 6개월 징역형을 살았다. 앞서 그를 상습 성폭행하던 자원봉사자에 의해 강제로 머리를 깎이고 발가벗겨진 채 길에 쫓겨났다가 경찰에 끌려간 것도 여러 차례였다.

극도의 트라우마에 노출된 사람은 크게 세 가지 반응을 보인다고 한다. 공포와 고통에 맞서 싸우거나(fight) 도망치거나(flight) 얼어붙는 것(freeze). 그의 몸이 선택한 반응은 세 번째였다. 그는 ‘예-아니오’나 ‘고맙다’는 말, 경찰에게 이름과 사회보장번호를 대는 것 외엔 아예 말을 못 했다고, 말이 나오지 않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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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된 지역에 인프라 투자를 늘리고 청소년 직업 교육 등을 제공하는 비영리단체 '주택지원협회(Supportive Housing Association)'의 2022년 컨퍼런스에서 연설하는 로리 이어우드. 그는 '절망의 한 가운데'에 있는 이들에게 건네고 싶은 단 한마디 조언을 청하자 세상이 여러분에게 무엇을 투영하려 하든, 그것대로 스스로를 판단하지 말라고 말했다. 유튜브 화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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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5월 그날, 그는 자신의 옛 직업을 알게 된 한 종교단체 급식소 봉사자와 목사의 도움으로 지역 홈리스 매체(Street News)에서 일거리를 얻는다. 그는 월 2회 글을 쓰고 건당 100달러의 고료를 받았다. 또 전직 경찰이자 성폭행 생존자로 비영리 빈민운동단체 ‘Journey of Hope’를 설립한 섀넌 밀러 콕스(Shannon Miller Cox)의 주선으로 약물중독자 임시재활가정을 돌보게 됐다. 월세 없이 살면서 수용자와 시설을 돌보는 일. 그에게 '집'이 생긴 거였다. 시급 11달러의 ‘홀푸드마켓’ 일자리도 얻었다. 임시재활가정은 운영난으로 6개월 만에 문을 닫게 됐지만, 그는 또 한 여성 교수의 호의로 교수의 아파트 방 한 칸에 시세보다 싼 월 400달러를 내고 1년간 살 수 있게 됐다. 그의 사연을 알게 된 마이애미 헤럴드 시절 선배(Tom Shroder)가 그의 전 직장인 워싱턴포스트에 에세이를 실을 수 있게 주선했다. 2018년 10월 26일자 1면에 실린 6,600자 에세이. 그는 원고료 5,000달러로 보증금을 내고 방 한 칸짜리 공공임대아파트 '내 집'에 입주했다.
연방-주정부 공공임대주택 입주 요건을 갖춘 이들 중 실제 입주자는 신청자의 1/4에 불과하다고 한다. 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중소도시의 경우 최소 1~2년, 대도시는 10년 넘게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버텨야 한다. 미국의 홈리스는 2022년 말 기준 58만2,462명이다.

이어우드는 어쩌면 행운아였다. 그는 여러 사람의 실질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었고, 사회가 인정하는 능력이 있었고, 용케 약물에 중독되지 않았다. 대학 전공 선택을 앞두고 전전긍긍하던 그에게, 짐 크로 시대를 가난한 흑인 이민자로 살아낸 아버지가 해준 “뭘 해야 할지 모르겠거든, 마음이 끌리는 데로 일단 발을 내디뎌 보라”던 조언도 아주 잊진 않고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에세이는 그에게 새로운 동앗줄들을 선사했다. 그는 경제적 약자 이슈에 특화한 비영리 언론단체 ‘경제적 곤경 보도 프로젝트(EHRP)'에서 원고료를 지원 받으며 꾸준히 기사와 칼럼을 썼다. 뉴욕타임스와 가디언 등도 그에게 지면을 내어주곤 했다. 그는 빈곤- 홈리스 문제에 관한 한 “경험과 공감에 기반한 독창적인 관점”을 지닌 저널리스트로 널리 인정받았다. 스스로는 자신을 ‘트라우마에 주목하는(trauma-aware) 저널리스트’라 소개하곤 했다. 기피당하고, 손가락질 당하고, 그러면서 스스로를 탓하는 데 익숙해진 이들, 죄의식과 자기부정- 자기모멸감에 자의식이 만신창이가 된, 과거의 자신과 같은 이들을 대변하는 기자라는 의미이자 다짐이었다.

사회는 그를 ‘어둠을 딛고 다시 일어선(emergence, 浮上)’ 주인공으로 미화하곤 했다. 그는 2022년 ‘머더 존스’ 에세이에 “그건 내 얘기가 아니다"라고 썼다. "2007년 이후로도(…) 나는 여전히 비인간적인, 더 은밀한 인격적 훼손(quieter violations)’을 감당해왔다. 사회가 ‘노숙자 문제’ 해결을 위한 전제의 일부로 승인한 것들. 한때 홈리스였던 사람들은 타인의 관대함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 끊임없이 확인하는 도덕적 평가 시스템에 갇힌 채 지속적인 감시의 대상으로서 살아야 한다.”
그에게 방을 빌려준 교수가 집을 떠나던 날 했다는 말- “당신의 나의 프로젝트였다”-이 그 예 중 하나였다. 동거하는 동안 그는 집주인 눈치를 보며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살아야 했’고, 늘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어떤 상황에서도 화를 내지 않아야 했다고 한다. “여러분은 환자로서, 여러분과 눈조차 마주치는 걸 귀찮아 하는 의사를 상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당신은 의사의 전문지식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가 당신을 멍청이로 여기는 걸 알면서도 참아야 한다. 그건 ‘선물 관계(gift-relationship)’라 불리는 감옥에 갇힌 느낌과 유사하다. 다른 점이라면 한번 홈리스가 되면 탈출구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소리치고 싶다. 나는 홈리스였다. 그리고. 지금. 나는. 결심했다. 뭔가. 다른. 당신의. 프로젝트. 가 아닌. 어떤 것이 되겠다고.” 그는 저 마침표들로 여전히 찍히지 않은 '다시 서기'의 마침표를, 그 상처와 모멸감을, 절규하듯 표현했다.

이어우드의 도움을 받아 ‘홈리스 프로젝트’를 진행해온 뉴욕타임스 에디터 미타 애그러월(Meeta Agrawal)은 “(그는) 뛰어난 통찰력과 힘겹게 얻은 지식, 깊은 열정으로 우리 프로젝트의 방향을 정립해주었다”고 평했다. 이어우드는 프로젝트 원고를 엮어 연내 출간한다는 그 책의 '추천사'를 쓰지 못했고, 오래 공들여 써왔다는 회고록 원고도 마무리하지 못했다.

최윤필 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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