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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포퓰리즘 앞세운 정치인 선동, 민주주의·자본주의 모두 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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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마틴 울프 지음, 페이지2북스 펴냄)

독재정권 속속 몰락중이지만

정치적 무질서·혼란은 가중

기존 엘리트 집단 불신 커져

트럼프 등 경제위기 업고 득세

10년만에 돌아온 마틴 울프

"정치·경제, 균형 상태 이뤄야"

서울경제



“엘리트의 능력과 타당성에 대한 신뢰 상실은 필연적으로 민주적 정당성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린다. 사람들은 더 이상 국가가 자신들을 위해 통치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2014년 영국 파이낸셜타임즈(FT)의 수석 칼럼니스트인 마틴 울프는 글로벌 금융 위기를 다룬 저서 ‘변화와 충격(The Shifts and the Shocks)’에서 엘리트의 실패를 지적하며 분노의 포퓰리즘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고 경고했다. 그는 "다음 번에는 반드시 불이 날 것”이라고 지적했는데 10년 만에 입장을 수정했다. “내가 틀렸다. 다음 번이 아니라 바로 지금 불이 났다. 코로나19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영향으로 불은 더 뜨겁게 타오르고 있다.”

금융 저널리즘에 기여한 공로로 대영제국훈장(CBE)을 받은 울프가 신간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위기’로 돌아왔다. 그가 책을 구상한 것은 2016년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 후보로 부상한 것이 계기가 됐다.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취약점이 트럼프에게 빈틈을 줬고 포퓰리즘과 대혼돈 속에서 다시 민주주의적 자본주의를 회복시키는 것이 엘리트들의 책임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정치 연구 센터 ‘폴리티 IV’에 따르면 지구상의 독재 국가 수는 1989년 62곳에서 2016년 3분의 1 수준인 21곳으로 줄었다. 이 기간 ‘아노크라시(독재와 민주주의의 중간 상태로 무질서한 정치체제)’ 국가는 39개에서 49개로 증가했다. 독재정권이 몰락했지만 무질서, 무정부 상황 속에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는 리비아 같은 나라가 그 예다. 울프는 아노크라시 비중이 줄지 않는 것을 언급하며 “독재보다 혼돈이 민주주의의 더 큰 적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상황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이 같은 정치적 혼돈이 자본주의에도 영향을 준다는 것이다. 실제로 세계화를 비롯해 시장 자본주의의 상승과 하락 패턴은 민주화의 패턴과 일치한다. 무역이 붕괴하면 민주주의 국가의 비율도 급락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1985년부터 2007년까지 세계 실질 무역은 세계 국가총생산(GDP) 평균 대비 두 배 이상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는 급격히 둔화됐다. 세계화의 초석이 되는 가장 마지막 사건으로 2001년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 가입한 게 꼽힐 정도다. 이 기간 세계적으로 지정학적 갈등도 극대화됐다.

저성장, 불평등의 심화, 좋은 일자리의 상실 등 경제적 실패는 포퓰리스트의 등장을 부추기는 상황이 됐다. 포퓰리즘의 등장 역시 기존 엘리트에 대한 불신과 관련이 있다. 울프에 따르면 사람들은 타고난 지도자를 찾을 수 없을 때 기존 엘리트를 두고 자신감 있는 우파 포퓰리스트를 선택한다. 좌파 포퓰리스트와 달리 우파 포퓰리스트가 선택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좌파 포퓰리즘은 희망을 약속하지만 희망은 신뢰라는 조건이 필요하고 우파 포퓰리즘은 두려움과 분노를 무기로 삼는데 이 영역엔 단지 적이 필요할 뿐이기 때문이다.

울프는 정치와 경제의 균형 상태를 두고 결혼생활에 빗댄다. 좋은 결혼생활에서는 각 파트너의 강점이 상대방의 약점을 상쇄하지만 반대로 나쁜 결혼 생활에서는 각 파트너의 약점이 상대방의 강점을 상쇄한다는 것.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로 울프가 내세우는 건 ‘메덴 아간(Meden Agan)’이다. 델파이의 아폴로 신전 기둥에 쓰인 경구로 그리스어로 ‘무엇이든 과도해져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울프는 불이 더 커지기 전에 정치, 경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보편적 행복을 추구하는 대신 피해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개혁이 이뤄져야 하며, 엘리트들이 개인의 이익을 사회적 역할에 앞세우는 것을 극도로 경계해야 한다고 말한다.

세계화를 가로막아 장기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미·중 갈등에 대해서도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할 것을 강조했다. 상호 간의 의심과 공포가 기존 강대국과 신흥 강대국의 충돌로 악화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것. 그는 상호 의존성을 높이기 위해서 중국의 청년층이 미국 등에서 공부하고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일대일로’에 대응해 서방의 국가들이 개발도상국의 경제 개발을 돕는 투자를 촉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다만 상호 의존과 협력을 내세운 미·중 갈등의 해결 방안은 실효성이 적다고 보았다. 책말미에 그는 유독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오는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라는 큰 변수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책의 마지막 부분을 쓰고 있는 2022년 겨울 현재, 나는 미국이 2020년대가 끝나갈 무렵에도 여전히 민주주의가 작동할 지 의심하고 있다.”

정혜진 기자 madein@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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