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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사랑-청산옥에서 12[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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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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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찢은 칼이 칼끝을 숙이며
정말 미안해하며 제가 낸 상처를
들여다보네.

칼에 찢긴 상처가 괜찮다며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그 칼을
내다보네.

윤제림(1960∼ )


사춘기 딸아이는 좀 무섭다. 사랑하는 사이라고 해도 상처는 받는다. 그래도 가끔 “엄마 미안해”라는 말을 들으면 딱 이 시의 심정이 되고 만다. 후벼판 것 같던 마음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나는 너를 몹시 사랑하는구나.’

나의 상처를 네가 알아주어 다행이고 너의 사과로 상처가 아물어서 다행이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극소수다. 사실 남 걱정하지도 않으면서, 제가 한 말은 금방 잊을 거면서 쉽게 상처 주는 인간들이 정말 많다. 시에서 상처는 칼이 입혔다지만 요즘은 말이 칼날이다. 사람 입에서 칼날이 쏟아져 나오면 피할 길이 없다. 얼마 전에 우연히 만난 한 선생님이 당신 참 열심히 산다면서 계속 그렇게 사시라고 빈정거렸다. 그때 뭐라도 항변했어야 하는데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쳤다. 한 대 맞으면 경찰서라도 갈 텐데 말로 맞으면 어디 호소할 데도 없다.

상처 없이 사는 인생이 어디 있을까. 만약 상처를 꼭 받아야 하는 게 인생이고 상처의 종류를 선택할 수 있다면 나는 사랑하는 사람한테만 받고 싶다. 그러니까 사랑하지도 않을 거면서 사과하지도 않을 거면서 상처 입히고 달아나지 말라는 말이다. 제발이지 꽃 피는 4월에는 상처받지도, 주지도 말자.

나민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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