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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이슈 미술의 세계

공원엔 장미 대신 들풀, 병원엔 녹지공원…생태 조경가가 '땅에 쓰는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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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영화 ‘땅에 쓰는 시’. 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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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1호 국토개발기술사(조경)를 획득한 최초의 여성. 국내뿐 아니라 국외에서도 찬사받는 1세대 조경가 정영선(83)의 정원에는 그 흔한 장미나 튤립이 없다. 서울 성수동 디올하우스에 프랑스 브랜드 특성을 살려 장미를 일부 심었지만 선유도공원, 여의도 샛강생태공원 등 그의 진가가 녹아있는 대표작들에는 ‘정원’하면 떠올릴 꽃들이 없다. 대신 개미취, 오이풀꽃, 큰산꼬리풀, 개쑥부쟁이 같은 낯선 이름의 꽃들, 너무나 흔해서 그 이름조차 불러보지 않았던 들꽃과 이른바 ‘잡초’들로 빼곡하다.



정영선이 만든 공간은 정원과 들판, 도시와 깊은 산 속 중간의 어디쯤 서있는 듯한 경험을 제공한다. 17일 개봉하는 ‘땅에 쓰는 시’는 조경이라는 개념도 희미하던 시절부터 삶의 터전과 자연을 연결하기 위해 분투해온 정영선의 노력과 성과를 사계절에 걸쳐 담은 아름다운 다큐멘터리다.



선유도공원은 대표작으로 꼽힌다. 폐쇄된 정수장 골조를 살리며 녹지로 바꾼 선유도공원은 영국 런던에 버려진 화력발전소를 미술관으로 변신시켜 세계적 명소가 된 테이트모던에 비견된다. 무뚝뚝하게 서있는 시멘트를 감싸는 나무와 풀들은 성인들에게는 휴식을,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를 제공하면서 한국 조경설계의 방향을 바꾼 걸작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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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땅에 쓰는 시’. 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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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시인을 꿈꾸며 교사였던 아버지의 동료 박목월 시인에게도 재능을 인정받았던 정씨가 조경으로 진로를 결정한 건 유년의 기억들 덕이었다. “작은 샘 옆 큰 바위 틈에서 자란 작은 백합, 과수원 전체에 떨어져 흩날리던 사과꽃들” 등 지금도 생생한 어린 시절의 풍경은 영문과 대신 농대를 선택하게 했고 그를 서울대 환경대학원의 첫 졸업생으로 만들었다.



그는 도시화로 “사라지고 없어지니까 더 사무치는 아름다움”을 찾아오기 위해 일반 아파트로는 처음으로 1984년 서울 아시아선수촌아파트에 조경설계를 적용했다. 화단의 대표 선수이던 장미 등 서구 식물 대신 자생종 중심으로 “우리 것의 아름다움”을 사람들의 삶으로 끌어오며 도시와 자연, 일상과 휴식,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는 “연결사”로서 조경가의 정체성이 싹을 틔우기 시작한 시점이다.



단순히 아름다움의 전시가 아니라 삶과 밀착된 조경으로 그의 철학이 빛나는 또 하나의 작품은 서울아산병원이다. “몸이 아픈 환자는 병실 침대 대신 나무 그늘 아래서 울 수 있고, 억장이 무너지는 가족은 마음 편하게 숨어서 울 수 있는” 공간으로 병원 앞에 나무가 빼곡한 녹지 정원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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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땅에 쓰는 시’. 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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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로서 1세대 조경가의 삶이 순탄할 리는 없었다.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1997년 완성한 여의도 샛강생태공원을 만들 때는 허구헌날 시에 끌려가 볶이는 게 일이었다. 주차장도 없고 관리사무소도 없는 공원이 말이 되냐는 비난을 김수영의 시 ‘풀’로 물리치면서 그는 주차장뿐 아니라 벤치도 가로등도 없는 국내 최초의 생태공원을 완성했고 이곳은 천연기념물 황조롱이를 비롯한 희귀종이 도심 한가운데서 마음 편하게 둥지를 트는 장소로 자리 잡았다.



지금도 직접 땅을 일구고 풀을 심으며 손톱이 새까만 손으로 설계도를 그리는 정씨는 어린 손주와 함께 호미질을 하면서 “어린 애들이 와서 메뚜기를 잡고 물을 만질 수 있는 (땅을) 물려주는 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조경을 꽃이나 나무를 심고 예쁘게 다듬는 차원으로 이해하는 것에서 벗어나 (많은 이들이) 생태적, 인문학적 관점에서 우리 국토를 보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돕는 게 내 마지막 과제”라고 팔순 현역의 포부를 밝혔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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