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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30 (화)

소나무 껍질 먹다 아사한 군인…군번 없어 피해자 규명 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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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남하하는 국민방위군 장정들. 격동한반도새지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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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는 주먹밥에 반찬은 소금국에 고사리를 넣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식사시간이면 커다란 국통에 있는 고사리 하나라도 건져먹기 위해 아비규환을 연출했다. 여기서 장정들의 일과는 훈련을 하고 틈틈이 한라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하는 것이었다. 행군 중에는 주민들이 말리던 썩은 고구마 조각을 주워 먹고, 한라산에서는 소나무 껍질이나 싱아 같은 식용풀을 먹었다. 우물가를 지날 때는 시궁창에 버려진 밥찌꺼기들을 밥풀 하나하나를 닭이 쪼아 먹듯이 건져서 삼켰다. 인분을 잔뜩 뿌린 채소밭에 뛰어 들어가 당근이며 마늘 등을 씻지도 않고 입에 처넣었다.”



“그런데 거기서 계란만한 밥덩이 하나를 100원씩에 팔아. 중대장이 팔아먹는 거라고. 우리에게 주는 주먹밥을 쪼개서 그걸 만들어서 팔아먹는 거라고. 그렇게 한 달을 먹고 났더니 다리가 뒤틀려서 걷지를 못하겠더라고. 아주 삐쩍 말라가지고…, 하루는 옆에 있는 젊은 사람이 낮에 바닷가에서 무슨 해초 같은 걸 뜯어 먹었어. 밤새 배가 아프다고 난리를 치는데, 병원이 있나 뭐가 있나. 그냥 내버려뒀더니 아침에 죽었어. 제사를 지내주는데 밥을 한 사발에 반찬 좀 올려놓고 전부 다 서서 초상을 치른 거지. 그리고 학교 뒤 산비탈을 파고서 그냥 묻었어. 그리고는 제사를 지낸 밥을 서로 먹으려고 싸우는 모습을 보니 인간도 아니고 완전히 개, 돼지보다도 못한 꼴이지 뭐…”



-1기 진실화해위 <국민방위군 생존자 증언> 가운데 일부 발췌





군인들의 행진이 아니라 거지 중의 거지, 상거지들의 행진이었다. 사실상 국가의 ‘아군 학살’이었다. 엄동설한의 남하(南下) 명령과 간부들의 횡령으로 수만 명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은 한국전쟁기 국민방위군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진실규명이 내려졌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16일 제76차 전체위원회에서 1950년 11월부터 1951년 1월 사이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 이동·수용·훈련·귀환하던 중 숨진 김용주씨 등 5명의 기본권이 침해됐다고 결정하고, 국가는 이들에게 보훈의 예우를 갖춰 피해 회복 및 화해를 위한 적절한 조처를 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이들 5명에 대한 후속 조처가 얼마나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2010년 6월 1기 진실화해위 때 직권조사로 진실 규명된 10명의 국민방위군 피해자 중 9명의 순직 및 전사 결정 등 피해구제가 아직도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당시 국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새로이 전개되는 전황을 타개하는 한편, 청장년을 후방의 지역으로 집단·철수시켜 예비전력을 확보하고 장차 전선에 필요한 보충병력으로 활용하기 위해 제2국민병인 국민방위군(1951년 12월11일 설치법 공포)을 창설했다. 이에 군은 1950년 11월께부터 만 17살에서 40살 미만의 민간 남성들을 지방 병무행정기구인 전국의 병사구사령부 등을 통해 소집하고 경상남북도, 제주도 등에 교육대를 편성해 남쪽으로 이동시켰지만 창설 4개월여 만에 해체됐다. 간부들의 횡령으로 식량·군복 등 군수물자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해 최소 5만명 이상이 아사하거나 동사 또는 질병으로 병사했기 때문이다. 1951년 7월 군이 ‘동아일보’에 밝힌 국민방위군 소집자 인원은 68만35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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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훈련소에서 국민방위군 신병들이 DDP 소독을 받고 있다. 어찌나 이가 많았던지 옷을 벗고 빗자루로 몸을 쓸어야 할 정도였다고 한다. 다큐멘터리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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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중이 높은 사망 원인은 기아와 전염병이었다. 국민방위군에 배급된 식량은 4홉으로 5홉 5작을 배급받던 전쟁포로보다 적은 양이었다. 배급량은 갈수록 줄어 나중에는 달걀만한 소금 주먹밥이 나왔고, 굶주림에 직면하다 못해 바닷물을 먹고 사망에 이른 예도 있었으며, 밥을 훔쳐 먹다 기간병에게 맞아 죽기도 했다. 열악한 영양공급 상태와 비위생적인 환경 속에서 대규모 인원을 집단 수용하게 되자 발진티푸스 등 전염병이 급속히 퍼져 사망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진실 규명된 ㄱ씨는 1951년 1.4후퇴 이후 강원도 홍천군 서석면에서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 삼천포 교육대까지 이동했으며, 교육대에서 전염병을 얻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교육대 뒷산 나무 아래 묻혔다. 또 다른 진실규명자 ㄴ씨 역시 1951년 1.4후퇴 이후 인천시 강화군 교동면에서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돼 제주 교육대로 배를 타고 이동했으며 교육대에서 병을 얻어 집으로 귀환하지 못했다. 참고인들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ㄴ씨는 한복 차림으로 군대에 갔으며 교육대에서 잘 먹지 못해 병이 들어 부종으로 배가 부어, 집으로 귀환하는 버스에 올라타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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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천시 청통면 은해사 근처에 있는 국민방위군 추모비. 전국에서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진실화해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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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방위군은 비군인으로 분류되어 군번과 관련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한국전쟁 참전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에 따라 국가가 국민방위군 사망자 유족에게 사망 혹은 실종된 사유와 사실을 통보하지 않아 피해 회복 조치를 받기가 매우 어려웠다. 2016년 9월 20대 국회에서 국민방위군이 참전용사 예우를 받도록 국민방위군 진상규명 및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법안이 발의됐지만 제대로 된 논의 없이 폐기됐다.



국방부는 참전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 근거해 2002년부터 병적 기록이 없는 국민방위군을 ‘비군인’으로 분류하여 참전확인서를 발급해 주고 있는데, 진실화해위는 최근 11년간(2011~2022) 532명이 이를 발급 받았다고 밝혔다. 국방부 유해발굴감식단은 2002년부터 시작한 국민방위군 유해발굴을 통해 영천·서귀포·함양·김해 등 6개 지역에서 국민방위군 시신 158구를 발굴하기도 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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