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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진료 보는 의사 없고 정부와 싸움만”… 환자 발동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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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 의료대란 현실화 우려

대학병원선 ‘전공의 공백’ 한계

주1회 ‘진료 셧다운’ 동참 늘어나

"환자 목숨 부지하려 병원 떠돌아”

정부 “의료계, 비공개 협의도 거부

원점 재검토 입장 고수 매우 유감”

“예정된 수술·검사가 한 달 밀렸는데 의료진이 부족해 한 차례 더 늦춰졌고, 오늘 겨우 받았어요. 환자를 보는 의사는 없고 정부와 싸우기만 하니 환자들만 고통스러운 상황입니다. 암환자들끼리 서로 만나서 정보를 나누다 보면 진료가 늦어져서 상태가 급격히 악화한 소식만 들립니다.”

23일 서울 종로구 서울대병원을 찾은 비뇨기암 환자 박모(68)씨는 이같이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세계일보

끝 안보이는 대치 언제까지… 의대 증원 정책과 관련해 의·정 갈등이 계속되고 있는 23일, 대구 한 대학병원에서 내방객이 의자에 누워 휴식을 취하고 있다. 대구=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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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서울 대형병원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환자들은 말 못하는 불안감을 안고 있었다. 폐암 환자인 아버지를 모시고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을 찾은 김모(42)씨는 “당장 예약이 바뀌진 않더라도 언제 갑자기 수술이 밀릴지 모르니까 불안하다”며 “신경 쓸 게 많은데 병원 진료가 막힐 때에도 대비해야 해 마음이 분주하다”고 했다. 김씨는 “환자(아버지)가 파업 뉴스를 접하면 심리적으로 악영향이 있을 것 같다”고 걱정했다.

정부의 의대 증원 방침에 반발한 전공의들의 집단 이탈에 이어 이젠 현장을 지키던 의대 교수들마저 수술·진료를 축소하고 병원을 떠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중요 수술과 진료를 담당하는 교수들이 병원을 떠나면 지금보다 훨씬 심각한 의료 공백 사태가 우려된다. 환자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지난달 시작된 교수들의 집단사직서 제출은 25일 한 달이 된다. 의사들은 한 달이 지나면 사직서가 수리되지 않아도 효력이 발생한다는 입장이다. 정부는 실제 유효한 사직서 제출 사례가 많지 않아 의료대란으로 번지지 않을 것이라고 했지만, 20개 주요 의대가 소속된 전국의과대학교수 비상대책위원회는 이날 예정대로 사직을 강행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태를 낙관할 수 없어 보인다.

교수 집단 사직이 아니더라도 한 달 전 예고한 외래진료 개별 축소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일주일에 하루를 정해 진료·수술을 중단하는 움직임도 26일 시작된다.

세계일보

의대 교수들의 집단 사직 및 진료 축소 움직임이 가시화하고 있는 23일 오전 서울시내 한 대학병원에서 의료진이 교수연구동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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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 집단 이탈’ 사실 아니라지만…

전공의가 떠나면서 두 달 이상 과로가 겹친 데다 최근 현장에서 교수 2명이 숨지면서 의대 교수 사회는 위기감이 팽배하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교수는 “지방 한 사립대병원 특정 과에선 20∼30%가 나갈 거라는 얘기를 들었다. 의국별, 병원별로 차이가 있을 것 같다”며 “25일에 한번에 많은 교수들이 빠지기보다는 조금씩 나가는 분위기가 될 수 있다. 오늘 당직인데 육체적 정신적 피로도가 너무 크다”고 하소연했다.

한 대학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전공의 사태 장기화로 평일·주말 할 것 없이 주 1∼2회씩 당직을 하고, 다음 날 연달아 평소와 같은 일정대로 외래진료를 모두 소화하고 있어 신체적 정신적 과부하로 한계치에 이르렀다”며 “진정 환자를 위한다면 피로도가 극에 달한 의료진으로 대한민국 의료시스템을 유지하는 현 상황에 대한 조속한 해결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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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오후 서울대병원에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가 환자들에게 드리는 글이 붙어 있다. 전공의 다수가 의료현장을 이탈하면서 병원에 남은 의료진의 체력적 문제가 우려되면서 의대 교수들이 매주 1회 진료와 수술을 중단하는 이른바 '셧다운'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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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실 “유감”, 환자 ‘불안’

대통령실은 의사단체가 정부와 협상에 나서지 않고 의대 증원 ‘원점 재검토’ 입장을 고수하는 데 대해 “매우 유감”이라고 밝혔다. 장상윤 사회수석은 이날 브리핑에서 “의료계에서 정부와 일대일 대화를 원한다는 주장이 있어, 일주일 전부터 ‘5+4 의정협의체’를 비공개로 제안했지만 이마저도 거부하고 있다”고 밝혔다.

대통령실은 특히 일각에서 제기된 의대 교수 집단사직 가능성에 대해 “사실이 아니다”라며 “의대 교수들의 사직서 제출 여부와 사직 사유 등이 다양하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사직의 효력이 발생한다고 볼 수 없고, 특히 집단행동은 사직의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런 대통령실의 주장이 의대 교수들을 붙잡진 못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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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윤 대통령실 사회수석이 23일 용산 대통령실 청사 오픈라운지에서 의료개혁 추진 상황 관련 브리핑을 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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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들과 정부의 극한 대립 속에 환자들의 불안감은 극에 달하고 있다.

서울 한 대학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던 한 환자는 암이 뼈로 전이됐다는 소식을 듣고도 진료받을 병원을 찾지 못해 불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는데, 교수들 이탈이 가속화하면 상황은 더 악화할 수밖에 없다. 이 환자는 ‘좀 더 치료를 받는다면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희망을 가졌지만, 병원 측은 ‘더 이상 내원하지 않아도 된다. 호스피스 병동을 알아보라’고 말했다고 한다. 다른 병원에서도 “밀린 환자가 너무 많아 진료가 어렵다”는 얘기를 들었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대표는 교수들 사직에 대해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했다. 김 대표는 “교수들은 피로도가 너무 누적돼 이 상태로 진료하면 환자들에게 위험한 상황이 닥칠 거라고 얘기하지만, 이런 행동을 하기 전에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에게 돌아오라고 한마디 하는 게 의료인으로서 환자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이자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비판했다.

정재영·이정한·이예림·정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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