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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6 (월)

“분단은 인륜 대참사…‘사람 문제’에 관심 갖고 정서적 통합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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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라종일 백봉 정치문화교육연구원 이사장이 19일 서울 장충동 서울클럽에서 백봉 한반도 문화상 제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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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이름이, 김씨가 아니라 허씨야.” “(울부짖으며) 이름도, 나이도 모르고 살았어요. 오빠~, 이제 죽어도 한이 없어요”. 유튜브에서 다시 봐도 콧등이 시큰한 한국방송(KBS)의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장면. 1983년 아침방송에서 단발성으로 기획한 상봉행사가 마른 벌판의 불길이 되어 온 국민을 울렸다. 정규편성을 들어내고 138일간 이어진 생방송, 최고 시청률 78%라는 전무후무한 기록과 함께 1만189 가족이 그리던 부모, 형제를 찾았다. 전쟁과 분단의 참상을 이보다 생생히 드러낼 수 없었기에 세계인의 주목을 받았고, 방송 기록물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도 등재됐다.



그로부터 41년이 지난 지금, 철책선은 요지부동이고 상봉은커녕 소식조차 모르는 더 많은 이들이 혈육을 그리다 속속 생을 마감하고 있다. 4차례의 정상회담이 무색하게 근래 남북관계는 최악으로 치닫는다. 미국-일본-남한과 중국-러시아-북한이 스크럼을 짜고 대립하는 신냉전 상황에서 분단극복의 길은 아득히 멀어진 듯 보인다.



평생 외교·안보 분야 연구에 몰두한 라종일(84) 백봉정치문화교육연구원 이사장은 길이 안 보이는 혼미 속에서 다시 한 걸음 내딛기로 했다. 그가 이끄는 연구원은 올해부터 ‘한반도 문화상’을 제정해 시상한다. 분단이 낳은 인륜적, 인도주의적 비극을 예술로 승화하거나 기록으로 부각한 사람에게 상을 준다. 그를 지난 19일 장충동 서울클럽에서 만나 상을 만든 취지와 변화된 국제정세 속에서 남북문제를 어떻게 풀어갈지에 대해 들었다.





분단이 낳은 인륜·인도주의 비극을
기록·예술로 형상화한 사람 선정
“인터넷 시대에 혈육과 연락도 안돼
정치·이념 넘어 ‘사람 문제’에 관심을”



“현 정부, 외교 선택의 폭 자꾸 좁혀”
강대국의 ‘장기 말’로 회귀할까 우려





우선 왜 지금 이런 상을 통해 분단의 아픔을 새기고 마음을 다져야 해야 하는지 물었다. 라 이사장은 “지도상 위도를 죽 그은 분단과 이어진 한국전쟁은 인륜과 인도주의의 대참사였습니다”라며 말문을 연다. 그런 단절이 한 세기를 향해 가는데 흩어진 혈육이 연락도 안 되는 상황이 너무 가슴 아프다 했다. “세계가 인터넷으로 연결된 시대에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특이한 일입니다. 이 상을 통해 국민의 관심을 높이고 남북 통합에 기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는 통일을 지향하고, 정서적 일치를 이루려는 움직임이 “약해지다 못해 정체기”라 진단했다. “북한은 남은 수단은 무력뿐이고 ‘같은 민족이 아니다’는 말까지 합니다. 남한도 열의가 많이 낮아졌습니다. 어려운 때임에도 우리가 계속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이건 안 되는 일이다’ 하고 손을 놓기보다 뭐라도 해야 합니다.”



문화적으로 분단 극복을 모색하는 이유에 대해 라 이사장은 “냉철한 이론이나 이성도 중요하지만 정서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있습니다. 그동안 정상회담을 하고, 햇볕정책이니 민족 공동체 통일이니 했지만 사람들의 구체적인 고통은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 고통을 문학, 역사, 철학, 예술로 형상화하고 후세에 남기자는 것입니다. 정치, 지정학, 이념을 넘어 사람의 문제에 더 마음을 쓰자는 취지입니다”라 말한다. 그가 언급한 정서의 힘은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의 뜨거운 열기가 냉랭한 남북관계를 녹여 방송 2년 후인 1985년 남북한 당국이 주선한 이산가족 상봉으로 이어진 것이 예가 될 수 있겠다.



문화적 접근은 그가 정치에서 먼저 시도한 것이다. 라 이사장의 선친은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제헌의회 의원과 국회부의장을 지낸 백봉(白峰) 라용균(1895~1984) 선생이다. 연구원은 그의 호를 따 제정한 ‘백봉 신사상’을 1999년 이후 해마다 시상한다. 모범적인 의정활동을 한 국회의원에게 주는 이 상은 수상자들이 아주 명예롭게 여긴다. 이를 통해 그냥 두면 막말과 억지가 ‘우세종’이 되기 쉬운 정치판에서 ‘품격있는 정치’의 가치를 고양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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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외교·안보 분야에서 전략과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해온 그의 경험에 비춰 정세적, 정치적 의견이 없을 수 없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해외·북한 담당 차장과 주영국 대사를, 노무현 정부에서는 대통령 비서실 국가안보보좌관과 주일본 대사를 지냈다. 라 이사장은 현 국제정세가 남북한이 냉전 초기 강대국의 ‘장기 말’ 노릇을 했던 때처럼 흘러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가장 안 좋은 시나리오는 전쟁으로 가는 겁니다. 한국전쟁도 중국과 미국을 대립시키려는 스탈린의 책략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북한 상황이 지금 어렵기 때문에 강대국의 수에 넘어갈 수 있습니다. 남북한의 화력을 볼 때 전쟁이 나면 다 죽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사정이 좀 나으니 북한에 유연하게 대응해야 합니다. 공존하고자 노력하고, 같은 민족이란 것을 절대 쉽게 버리면 안 됩니다”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 악화에 대해 라 이사장은 외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선택의 폭을 넓히는 것이라고 한다. “현 정부는 선택의 폭을 자꾸 좁히고 있어요. 그나마 시간이 있을 때 그 폭을 조금씩 늘려둬야 합니다. 중·러와 교류협력을 하고, 정 안되면 문화 교류라도 해야 합니다.”



8순의 나이이지만 라 이사장은 저술, 강연 등 활발한 활동을 한다. 지난달에는 2년여 준비해서 한·이탈리아 수교 140주년 기념 한국드라마페스티벌을 소렌토에서 열기도 했다. 제1회 백봉 한반도 문화상은 5월 말까지 추천을 받아 6월25일 시상한다. 라 이사장은 분단의 비극을 표상하되, 쉰들러 리스트처럼 인류 차원의 문제로 잘 부각한 작품이 많이 추천되기를 기대했다. 추천은 이메일 (baikbong7@naver.com)로 하면 된다.



글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bhlee@hani.co.kr, 정리·사진 김효진 보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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